벼루에 연적으로 물을 조금 따르고 먹으로 여러 번 문지른 뒤 서탁 위에 종이를 펼쳐 놓고 문진으로 누른다. 붓에 먹물을 묻힌 다음 소맷자락에 먹물이 묻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 글자씩 써 내려간다. 글씨 쓰는 도구가 붓밖에 없던 시절에 글씨 쓰기는 아주 번거로운 일이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분이 낮거나 재력이 부족하면 ‘글씨 쓸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글씨 쓰는 데 필요한 도구들인 문방구(文房具)는 거의가 귀한 물건이었으니, 글씨 쓰기를 배우면서 바로 종이에 붓을 대는 아이는 드물었다. 붓에 물을 묻혀 반질반질한 돌 위에 쓰거나 작은 나무막대기로 모래에 쓰는 연습을 거듭하여 숙달된 뒤에야 비로소 먹물 묻힌 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글씨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절차를 단순화하고 그 부담을 대폭 줄여준 물건이 연필이다. 납과 주석을 섞어 만든 가는 봉을 나무판에 끼운 필기구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564년 영국에서 흑연이 발견되자 그 이태 뒤에 나무판에 흑연을 삽입한 필기구가 나왔다. 1795년 프랑스의 콩테는 흑연과 진흙의 혼합물을 고온에서 구워 가늘고 단단하면서도 종이에 잘 써지는 물질을 만들었는데, 이로부터 연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땅에 처음 연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이 서양인인지 일본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물건에 처음 붙은 이름이 ‘왜붓’이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인도 많이 썼던 듯하다. 1897년에는 독립신문사에서 연필을 수입해 팔았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신식 학교들이 연필을 입학시험의 필수 지참물로 지정했다. 이 무렵부터 연필은 글씨 쓰기를 배우는 사람 모두가 처음 손에 쥐는 필기구가 되었다. 연필은 ‘모두가 글씨 쓸 줄 아는 시대’를 앞장서 연 물건이다. 연필의 또 다른 장점은 써 놓은 글씨를 쉽게 지울 수 있다는 점이다. 연필은 일단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고 한번 써놓은 글자는 지울 수 없다는 오래된 통념을 지우는 데에도 단단히 한몫했을 것이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