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연탄

등록 2015-12-14 19:02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엔 기름 먹인 누런 장판지를 깐 방 한구석에 다갈색으로 그을린 자리가 있었다. ‘아랫목’이라 불린 이 자리는 평소엔 가장의 자리였고, 귀한 손님이 왔을 땐 그에게 내주는 자리였으며, 한겨울 찬 바람을 맞으며 떨다 들어온 다른 식구가 잠시나마 언 몸을 녹이는 자리였다. 한국인들에게 아랫목은 아주 오랫동안 안온함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아랫목을 가진 방들은 사라지기 직전 수십년간, 종종 살인흉기로 변하곤 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연탄가스 중독’은 한국인 사망 원인 순위의 앞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연탄이 난방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었는데, 냄새가 심하고 연기가 많이 났지만 값은 한참 싸서 가난한 사람들이 숯 대용품으로 이용했다. 1910년대에는 조개탄으로 불린 알 모양의 연탄이 개발되었고, 1920년대에는 구멍 뚫린 연탄이 나왔으며, 1930년대에는 구공탄이 연탄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구멍이 많을수록 불이 잘 붙고 잘 꺼지지 않았기에 구멍 수를 늘리는 기술이 발달하여 해방 뒤에는 19공탄, 22공탄, 25공탄 등이 속속 출시됐다. 하지만 1940년대까지 연탄은 아궁이를 점령하지 못했다.

인천상륙작전 일주일 뒤인 1950년 9월22일, 서울 탈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동안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겨울철 연료대책과 관련한 대통령 지시사항이 발표됐다. 산림녹화를 위해 땔나무 채벌을 엄금하며 대신 연탄을 공급할 테니 아궁이를 개량하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숱하게 죽어가는 판국에 나무를 살리자니, 사람들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바퀴 달린 연탄 화로를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개량’하는 사업은 곧바로 시작되어 휴전 후까지 계속됐다. 이후 30여년간, 해마다 수십만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됐고, 그중 수천명씩이 죽었다. 구들장 방을 연탄으로 데운 수십년간, 한국인들은 온기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오늘날 사회적 ‘온기’에 인색한 사람이 많은 것도, 그런 세월을 살아온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