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1952년 장수철, 최봉춘 부부가 작곡, 작사한 한국산 크리스마스 캐럴 ‘탄일종’의 1절이다. 종소리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까지 울려 퍼지려면 교회는 어디쯤에 있어야 했을까?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자취는 신라시대 네스토리우스교도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들이 교회를 세웠다는 증거는 없다. 그로부터 천년 뒤 청나라 연경에 갔던 이승훈이 자진해서 세례를 받았고, 이로써 한반도는 예수를 믿는 교인이 자생적으로 생긴 ‘기적의 땅’이 되었다. 하지만 그 뒤 80여년간, 조선은 ‘순교의 땅’이기도 했다. 19세기 벽두부터 60여년에 걸친 박해의 시기에 수천명의 천주교인들이 십자가를 밟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택했다.
이 땅에서 기독교 포교가 묵시적으로 허용된 것은 1884년이었으며, 교인들이 공공연히 모여들어 함께 기도하는 건물이 생긴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887년이었다. 1893년에는 천주교회가 순교의 땅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약현에 벽돌로 서양 고딕 양식의 건물을 지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첨탑 위에 십자가를 세운 이 건물은 이후 한국 교회 건축의 기본 모델이 되었다. 1897년에는 개신교의 감리교회도 정동에 서양식 교회 건물을 지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남짓 만에, ‘동구 밖에 기차 정거장, 언덕 위에 하얀 예배당’이 농촌 마을의 흔한 풍경이 되었고, 밤의 도시에서는 하늘의 별보다 땅의 십자가가 더 많이 보이게끔 되었다. 십자가를 올려 세운 건물의 증가 속도는 세계 역사상 공전절후 전무후무였다 해도 절대로 지나치지 않다. 이것만으로도 한반도는 기독교 세계에서 ‘기적의 땅’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 땅에 십자가가 늘어나는 만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안식을 주는 장소가 늘어났을까? 사랑으로 덮인 땅이 더 넓어졌을까? 십자가 세운 건물 안에 모이는 사람들이 대답할 일이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