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좋은 컵은 아마 ‘월드컵’일 게다. 이 컵을 4년 동안이나마 제 나라에 보관하는 건 축구선수뿐 아니라 현대인 대다수의 소망이다.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우승자나 우승팀에는 종종 컵을 상으로 주는데, 한자로는 배(盃)라 한다. 그런데 월드컵은 술을 담을 수 있게 생기지 않았는데도 왜 컵일까?
요즘이 제때인 송년회 자리에서는 ‘잔’에 술을 채우고 연장자나 상급자가 억지스레 조합해 선창한 단어를 복창하거나 ‘위하여’를 외치며 건배한다. 건배란 ‘배’가 마르도록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신다는 뜻이다. 왜 술은 ‘잔’에 따라놓고 ‘배’를 말리는 것일까?
받침대가 붙어 있는 것을 ‘배’, 없는 것을 ‘잔’이라 한다. 흙을 구워 만든 것을 ‘배’, 돌을 깎아 만든 것을 ‘잔’이라 한다는 설도 있다. 앞의 설을 취한다면, 배가 잔보다 격이 높다. 요즘 물건으로 치면 ‘배’는 와인글라스, ‘잔’은 소주잔에 해당한다. 옛날에는 제례용 술은 배에, 평상시 마시는 술과 차는 잔에 따랐고, 물은 그냥 그릇을 이용했다. 술 말고 다른 것을 담아 ‘축배’를 들지는 않는다.
인류는 술을 발견하자마자 그에 ‘신성한 음료’의 지위를 부여했다. 술을 마시면 전지전능한 신이 제 몸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 우승팀에 배를 주는 것도 신의 대리자인 황제나 왕이 개선한 장군에게 술 따른 배를 준 데에서 유래했다.
배와 잔을 구분하지 않고 ‘컵’으로 통칭하는 서양식 물그릇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고뿌’라는 이름으로 대중화했다. 현대인들이 가장 자주 입에 대는 것이 바로 이 물건이다. 그럼에도 건배라 하지 컵을 비우자고 하지는 않는다. 술의 신성성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니 건배할 때 한가지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술 마시는 건 ‘신’에 가까워지기 위해서지 ‘짐승’과 비슷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