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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아빠의 일관된 무관심 / 권혁철

등록 2016-01-03 18:42

지난해 11월 고3인 아들이 수능시험을 보고 와서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이놈이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아들은 “그동안 아빠가 공부에 간섭하지 않아서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계속 관심 갖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대입 수험생에게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들은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돈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으니 ‘아빠의 일관된 무관심’이라도 요구한 것이다.

아들은 지난해 내내 직장생활에 바쁜 아내에게 “엄마는 내신 9등급 엄마야!”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엄마가 학원 정보를 알아봐 줬어, 학원에 데려다 주기를 했어, ○○ 엄마는 학원, 독서실 앞에서 새벽까지 기다려. 엄마는 학생부 종합과 학생부 교과가 뭔지 제대로 알기나 해?”

한번은 아들이 나에게 수능 수학 문제집을 사오라고 부탁했는데 수학이 A, B형이 있어서 무엇을 사면 되냐고 아들에게 물었다가 “고3 부모 자격이 있느냐”는 쓴소리를 들었다. 당시 나는 “시험을 내가 보냐”고 대꾸했다. 아들은 이과여서 수능 과목이 수학 B형이다.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아빠의 무관심’도 잠시 흔들릴 뻔했다. 나는 수시에서 자기소개서(자소서)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20년 넘게 기자생활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 봤다. 당시 나는 ‘수험생 부모 노릇을 못했는데 멋진 자소서로 만회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들의 학교생활기록부에 몇가지 팩트만 있으면 그럴듯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소서를 풀어나갈 자신이 있었다.

아들에게 생활기록부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아들이 “자소서에 쓸 내용이 없다”고 듣지 않았다. 나중에 생활기록부를 살펴보니 아들 말이 맞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지만, 아들 자소서엔 꿸 구슬 자체가 없었다. 운동선수도 아닌 아들 자소서에는 축구를 무척 좋아하고 잘한다는 이야기만 있었다. 독서 이력을 보니, <88만원 세대><사당동+25>등을 읽고 양극화를 고민했다고 적혀 있었다. 좋은 책들이나, 이과 수험생 자소서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들의 자소서 쓰기를 포기했다.

입시 전문가들이 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좋은 생활기록부는 이런 식이다. 예를 들어 문학 시간에 ‘정지용의 삶과 시’를 공부한 뒤 모둠활동 시간에 ‘정지용과 천상병의 시세계 비교 연구’를 발표하고, 충북 옥천 정지용 생가를 문학기행 했다는 내용이다. 대학들은 이렇게 수업-평가-기록으로 유기적으로 엮인 생활기록부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생활기록부 내용을 학생들이 학교 공부 하면서 혼자 준비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부모가 입시설명회를 쫓아다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대학별 입시 전형을 파악하고, 자녀의 적성과 학업 능력을 따져서 필요한 책을 읽히고 입시 준비를 시키고 있다. 이 과정을 생활기록부에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권혁철 지역에디터
권혁철 지역에디터
이번 입시에서 수시 선발 인원(67.5%)이 수능 점수 위주로 뽑는 정시(32.5%)보다 2배 많다. 나는 수시 비중을 높이는 입시제도의 다양화가 마냥 바람직한지 회의적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수험생들이 부모의 경제력, 학력 순 등으로 입시 출발선에 서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입시제도에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인재 뽑기 못지않게 ‘가난의 대물림 현상’ 방지도 중요하다. 평범한 집 학생은 학교에서 정지용을 배운 것으로 끝나지만, 부모가 ‘입시 로드매니저’인 학생은 휴일에 충북 옥천으로 정지용 문학기행까지 떠난다. 이게 공정한가?

권혁철 지역에디터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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