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음력 4월13일, 고종은 동지사(冬至使)로 중국에 갔다 온 이정로, 이주영, 황장연을 궁으로 불러 보고를 듣고 노고를 치하했다. 500년 넘게 매년 되풀이된 의례인 ‘동지사 소견(召見)’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동지사의 기본 임무는 중국 황제에게 책력(冊曆)을 얻어 오는 일이었다. 물론 고구려 때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고 세종 때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 관측 기기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책력을 제작할 능력이 없어 중국에서 얻어 온 것은 아니다.
시간은 사람이 인지하는 천체의 리듬이다. 옛사람들은 천체의 운행은 곧 신의 뜻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그 법칙성을 인간에게 알릴 수 있는 권한은 신의 아들이나 대리인만이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책력은 천자(天子)만이 저작권을 갖는 특수한 책이었다. 책력을 얻어 오는 ‘의례’는 조선이 중국 천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의 일원임을 자처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에서 사용된 책력이 중국에서 얻어 온 것의 복제품은 아니었다. 동짓날이면 관상감에서 다음해 책력을 제작하여 각 관청에 나눠 줬는데, 하급 관리가 그것을 베껴 상급 관리에게 선물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청일전쟁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의례를 철폐한 조선은 1895년 음력 11월17일을 기해 역제를 양력으로 바꾸고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정했다. 이듬해 2월 거처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고종은 양력 역제는 그대로 두되 왕실과 국가의 의례는 음력으로 치르겠다고 밝혔다. 이후의 책력에는 양력과 음력이 함께 기록되었는데, 조선총독부도 이 관행은 굳이 없애지 않았다.
책력이 달력이라는 이름으로 대다수 민가에 침투한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예수상이나 불상, 정치인의 얼굴 사진, 수영복 차림의 여성 연예인 사진, 또는 세계의 명화나 기증한 업체의 상호 등을 핵심 구성요소로 삼아 집 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렸던 이 책자는, 7일 단위로 반복되는 생활주기를 갖는 현대인에겐 가장 기초적인 생활지침서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