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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바타비아 재판 기록 / 최원형

등록 2016-01-05 18:43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48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임시 군사재판을 열었다. 이곳에 주둔했던 일본 남방군 관할의 간부후보생 부대가 1944년 2월께 민간인 수용소에 있던 네덜란드 여성 35명을 스마랑 지역 위안소 4곳으로 강제로 끌고 가 매춘을 강요했던 사건(‘스마랑 사건’)을 다스리기 위한 재판이었다.

재판 기록에선 당시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던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일본어로 된 서류에 서명을 한 뒤 위안소로 끌려갔다. 잔인하게 구타를 하거나, “수용소에 있는 부모를 감옥에 가두거나 굶겨 죽이거나 바다에 던져버리겠다”, “훨씬 열악한 다른 위안소로 보내겠다” 등의 협박이 다반사였다. 일본군 장교와 민간인 포주로 이뤄진 피고들은 ‘여성들이 자원했다’는 논리를 폈지만, 재판부는 “일본인 스스로 만든 열악한 상황의 수용소에서 매춘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것 자체가 도덕성·인간성에 위배된다”며 이들에게 사형 및 2~20년 실형을 선고했다. 피고들의 말이 거짓말임이 명백하다고 판단했을 뿐 아니라 애초에 피해 여성들에게 ‘충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의사결정’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 자체를 꿰뚫어본 것이다.

흔치 않은 법원 판결이기에 바타비아 재판 기록은 ‘강제 동원’ 사실을 증명하는 강력한 근거로 제시되어 왔다. 그럼에도 일본 우익들은 이를 아예 외면하거나 “매우 예외적인 사건”, “조선인 대상의 강제동원 기록은 없다”는 식으로 호도하고 있다. 기록 너머의 진실, 곧 ‘충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의사결정’이 존재하지 않았던 식민지배의 현실을 바로 보지 않는 이상 ‘증거를 내놓으라’는 억지는 되풀이되기만 할 뿐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삶을 걸고 세상에 내놓은 증언들은 그 자체로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닌가?

최원형 여론미디어팀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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