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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보험증권

등록 2016-01-11 18:45

1883년 음력 11월 초 서울 시전가에 큰불이 났다. 15일 고종은 “화재를 당한 상인들이 매우 가엾다. 필시 건물을 수리하고 새로 짓는 데 힘이 부칠 것이다. 내탕금 1만냥과 포목 20동(1000필)을 내줄 테니 잘 헤아려 나누어 줌으로써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시전의 화재에 국가가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으나, 불쌍한 백성을 돕는 것은 군주의 도리였으니 시전 상인들에게는 왕이 보험이었다.

인생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재난이다. 옛날에는 갑작스런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먼저 친척과 이웃이 도왔고, 그들의 힘이 부치면 국가가 도왔다. ‘재난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집단’이 공동체였다. 사람들의 공동체가 무너져가자 돈의 공동체인 보험이 그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보험회사라는 이름을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은 1892년에 설립된 호상보험회사(護商保險會社)인데 수적(水賊)들로부터 상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보험료를 강제로 징수하다가 상인들의 반발로 곧 혁파되었다. 1897년에는 대조선보험회사가 설립되어 보험 업무를 개시했다. 이 회사가 발행한 보험증권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보험 조건은 매년 엽전 한 냥씩을 내면 기르던 소가 갑자기 죽거나 도둑맞을 경우 소 값을 물어 준다는 것이었으나 역시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고 윽박질러 보험료를 징수하는 데 머물렀다. 도장 찍힌 종이 한 장 받아 쥐고 속절없이 돈을 빼앗겨야 했던 농민들은 ‘우세’(牛稅)가 새로 생겼다고 정부를 원망했다. 정부는 곧 회사 허가를 취소했지만, 그 뒤에도 우척보험회사(1898), 무본보험회사(1900) 등이 잇따라 설립되어 같은 행태를 반복했다.

우리나라의 보험이 배와 소로부터 시작한 것은 당대에는 그것들이 가장 귀했기 때문이다. 근래 보험은 건강과 노후에 몰리고 있는데, 이는 몸의 가치가 높아지고 노후가 길어진 상황을 반영한다. 보험증권은 시대의 불안감을 측정하는 바로미터이자 믿을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는 시대의 표상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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