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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혁웅의 오목렌즈] 소녀와 청포도

등록 2016-01-17 19:19

권혁웅 시인
권혁웅 시인
이육사의 시 ‘청포도’에는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는 구절이 있다. 그이는 왜 청포를 입었을까? 당연히 “청포도” 때문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다. 다시 그 아름다운 시절이 돌아온다면, 청포를 입은 반가운 손님처럼 탐스러운 청포도가 열릴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손님은 청포도를 의인화한 것이면서, 청포도를 따서 대접하고 싶은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저 아이가 시동(侍童)이며, 따라서 이 구절이 시인의 귀족 취향을 보여준다는 비판이 있었다. 시인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한 비판이다. 행을 바꿔 나란히 놓인 두 말, “아이야”와 “하이얀”은 “청포도”와 “청포”처럼 서로가 서로를 되비추는 말이다. 곧 “아이야”는 “하이얀”의 변형이고, “하이얀 모시수건”은 청포를 입은 손님(내가 바라는 그이)을 맞아 정성스레 청포도를 대접하고 싶다는 정성의 표현이다. 평화의 소녀상이 내내 기다리고 있는 이도 청포를 입은 반가운 손님이었을 것이다. 나라의 지도자가 가해자들에게 가서 ‘망각’에 대해서 합의하고 왔다는 소식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반가운 손님도, 내 고장의 칠월도 아직 오지 않았다. 소녀의 기다림이 지속되어야 할 이유다.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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