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8월21일 오전 7시. 괌 기지에서 출격한 미군 B-52 전략폭격기 3대가 한반도 동해를 따라 북상하다 북한 원산 부근에서 갑자기 서쪽으로 90도 기수를 틀었다. 평양과 원산은 비슷한 위도에 자리잡고 있다. 같은 시각 한반도 상공에는 미군 F-4 24대, F-111 전투기 20대가 선회하고 있었다. 판문점 근처 포병부대는 개성의 북한군 부대와 포대(현재 개성공단 일대)를 겨냥하고 있었다.
1976년 8월21일 오전 미군과 국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흘 전인 8월18일 이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 맞아 숨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있었다.
그때 한국과 미국은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대해 북한이 군사적 대응을 할 경우 개성 일대의 북한군을 괴멸시키고, 황해도 예성강 하류 연백평야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참에 군사분계선(휴전선)을 예성강까지 북상시켜 한반도 작전환경의 짧은 종심(작전 범위나 길이)을 해소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한-미 양국군 지휘부는 짧은 종심 때문에 서울 방어를 고민하고 있었다. 휴전선에서 서울은 60㎞ 거리이고, 평양은 160㎞가량 떨어져 있다. 북한군이 휴전선 근처에서 장사정포를 쏘면 2~3분이면 서울 광화문과 수원 부근까지 포탄이 떨어진다. 반면 평양에는 한국이나 미군이 쏜 포탄이 닿지 않는다.
1976년 8월21일 오전 북한군은 국군과 미군의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대해 군사적 대응을 전혀 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군 지휘부가 내심 기대했던 휴전선 북상도 없던 일이 됐다. 그런데 이로부터 약 30년 뒤 총 한방 쏘지 않고 남북 군인 한명도 피 흘리지 않고 개성 근처 휴전선이 10㎞가량 ‘사실상’ 북상했다. 2000년 중반 휴전선과 개성 사이에 자리잡은 개성공단이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개성공단 터에는 북한 6사단, 64사단, 62포병여단 등 6만여 병력과 포진지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북한은 개성공단이 본격 가동하자 이 부대들을 10~15㎞가량 북쪽으로 옮겼다. 지금 개성공단 터는 유사시 북한군 대남 주공격로에 있다. 개성-문산 축선(개성-문산-서울)은 유사시 북한군의 최단 서울 공격로다. 다수 남쪽 사람들이 상주했던 개성공단이 공격축선에 자리잡으면서 북한군 처지에선 기습공격의 요체인 은밀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됐다. 부대 이동과 배치도 무척 불리해졌다.
2000년 6·15 공동선언 뒤 개성공단을 기획·설계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경남 창원공단(2000만평 50만명)을 모델 삼아 개성공단의 밑그림을 설명했다. 당시 정 명예회장이 “개성공단이 창원처럼 되더라도 개성과 주변 인구가 30만명밖에 안 된다”며 노동력 확보를 걱정하자, 김 위원장이 “남과 북에는 군인이 너무 많다. 그 단계가 되면 내가 인민군대 군복을 벗겨서 한 30만명을 공장에 넣겠다”고 대답했다. 실현되지 않았지만, 개성공단은 장기적으로 군축까지 염두에 둔 국가전략 안보 사업이었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던’ 개성공단이 문을 닫았다. 개성공단 터에는 물러갔던 북한군 부대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개성공단이 ‘북핵 개발 돈줄’이라고 주장하나, 정황만 이야기할 뿐 구체적 증거는 못 내놓고 있다. 현재까지 내가 보기엔 개성공단이 북핵 돈줄인지는 논란이고, 개성공단 중단 결정으로 북한의 기습공격 가능성과 수도권에 대한 북한 장사정포 위협이 높아진 것은 ‘팩트’에 가깝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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