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캐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그책, 2016
<캐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그책, 2016
여기, 고전에 대한 명쾌한 답이 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캐롤>의 원작에 나오는 대화다. “…이런 대사가 바로 고전이지. 백 명이 똑같은 대사를 읊는 게 고전이야. 하나의 연극이 고전으로 등극하기 위한 조건이 뭘까”, “고전…이요? 인간의 보편적 상황을 다루는 거죠”(251쪽).
인간의 보편적 상황이란 무엇일까. 나는 단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랑. 사랑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고 상대방이 대단해서는 더욱 아니다. 사랑의 상태만이 의식주처럼 사람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사랑의 범위는 대단히 좁다. 행복한 중산층 기혼 이성애자가 얼마나 되겠는가(여기서 또 남녀로 나뉜다). 그들의 행위만 규범으로 간주된다. 그러니 계급, 성별(동성애), 인종, 나이 등 궤도 밖의 조건으로 인한 힘든 사랑이 얼마나 많겠는가.
대부분의 사랑은 사회적 각본과 맞지 않는 우연한 사건이다. 30여년 전 미국 영화 <폴링 인 러브>(1984)는 통근 기차를 타면서 만난 기혼 남녀의 이야기다. 더구나 젊은 날의 로버트 드니로와 메릴 스트립이 나온다! 남자가 밤에 전화를 건다. 남편이 받는다. 20대 초반에 봤는데 “사랑에 빠지면 남의 집에 전화를 걸 수도 있구나.” 당시 나는 놀랐다. 아, 이런 답답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무엇을 못하겠는가.
가장 중요한 사랑의 조건은 너를 알고 싶다 혹은 그것을 알고 싶다는, 대상에 대한 앎에의 의지이다(사랑의 상대가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다). 알고 싶은 마음. 권태는 더 이상 알고 싶은 것이 없는 상태고, ‘밀당’은 ‘안 알려주겠다’는 시간 낭비고, 사랑의 끝은 질문이 없어진 상태다. 영원한 사랑은 성실한 인생들, 끊임없이 갱신하는 인간의 대화가 지속되는 ‘천국’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물어봐도 될까요?”, “제발 그래줘요”… 이런 대화는 어지러울 만큼 관능적이다.
소설 <캐롤>은 <리플리>의 작가로 유명한, 범죄 스릴러의 대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녀의 천재적, 인간적, 정치적 비범함을 여기 다 적을 수 없다. 나는 하이스미스를 알게 되면서 가장 좋아하는 영어권 작가가 바뀌었다. 게다가 문학 작품 번역자는 로컬의 소설가여야 하는데, 이 책이 딱 그렇다. 빼어난 번역(김미정) 덕분에 나는 전속력을 내서 읽었지만 모든 장면이 쏙쏙 들어왔다. 영화를 본 사람은 캐롤 역의 케이트 블란쳇이 “세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소설에서는 더 세다.
원래 제목은 <소금 값(The Price of Salt)>이었고 1952년 발표 당시에는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1960년대 커밍아웃을 했고 1990년에 <캐롤>로 재출간되었다. <소금 값>은 삶의 대가를 의미한다. 대가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작중 낙담한 테레즈는 “어찌 해야 이 세상을 되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의 소금을 되찾을 수 있을까?”(412쪽)라고 말한다. 하이스미스는 나중에 본명을 밝히고 작품의 제목을 캐롤 같은 주인공 이름으로 평범하게 바꾼다. 사랑의 대가는 모든 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지 레즈비언만이 치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 듯하다. 이 작품은 해피엔딩의 로맨스 소설이다. 여성들 사이의 사랑을 다루었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이성애 남성의 사랑 방식이 드러난다. 그들은 ‘소금 값’을 내기는커녕 세리처럼 행동한다.
캐롤의 상황은 보편적이지만 매력적이다. 작품 행간에 심리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이 빼곡하기 때문이다. 고전은 보편적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쓴’ 것이다. 캐롤이 부러운 이들이 많을 것 같다. 그녀는 다 가진 듯하다. 세상에 다시없을 친구, 연인, 그리고 자신의 길. 한 가지 불만이 있다. 연인의 뒤를 캐는 탐정이라는 작자에게 캐롤은 총을 겨누지 않는다(286쪽). 나 같으면 그 자식의 몸에 구멍을 냈을 텐데.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