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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강내희 칼럼] 미안한 정년퇴임

등록 2016-02-28 18:31수정 2016-02-28 19:50

나는 오늘 날짜로 30년 가까운 교단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을 맞게 된다. 노동자로서 이렇게 오래 일자리를 보전한 것은 큰 행운이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일상사가 되어 20대 신입사원에게까지 ‘희망퇴직’을 요구하는 것이 요즘 세태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대학교수의 노동조건도 기업 노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이 기업화해 교수의 연구와 교육 활동이 통제적 평가 대상이 되면서 생긴 결과다. 문제는 이로 인해 대학 사정이 나빠도 너무 나빠졌다는 것이다.

1987년 처음 정규직 교수가 되어 강의를 시작했을 때의 기대와 흥분을 잊지 못한다. 봄에 시작된 호헌반대 서명운동에 선배 교수의 만류를 뿌리치고 참여하던 일, 6월항쟁 기간 서울 도심 거리를 격정에 차서 배회하던 일, 그리고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출범 과정에 참여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처음 시작한 교수 생활은 우리 사회와 대학의 근본적인 민주화를 기대하게 할 만큼 나에겐 희망찬 것이었다.

‘18세기 이전 영시’ 과목을 강의하던 중 한 학생에게 받은 도발적인 질문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학생은 한국에서 영국 시를 배우게 하는 것은 자기 같은 학생을 제국주의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의도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자본주의적 세계체계가 형성된 만큼 헤게모니 국가의 시 전통을 읽어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현대 한국사회 문화의 비판적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는 ‘모범’ 답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업시간에 그런 도발적인 질문을 받고 보면 초짜 교수는 바짝 긴장되기 마련이었다. 당시에는 교수를 그렇게 교육시키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더러는 집회 도중 경찰에 연행되어 지도교수로서 면회를 가도록 만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정년퇴임을 맞아 바라보는 대학의 몰골은 가관이다. 내가 재직한 곳의 전임 총장과 이사장은 대학 역점사업을 놓고 특혜와 뇌물을 주고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한 사람은 수감 중이고, 한 사람은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 이사장은 교수들의 “목을 치겠다”는 공포 발언을 해 세간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교수 목 치겠다고 막말하는 이사장이 지배하는 대학은 대학다울 수가 없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한국 대학은 이처럼 몰골이 나빠도 너무 나빠졌다.

교단을 떠나면서 개인적으로는 홀가분하면서도 학생과 직원, 후배 교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제 대학에서는 누구도 자긍심을 가지고 양질의 학문과 교육, 행정을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처음 교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나 또한 학문적 포부가 작지 않았다. 과거 한국의 역사에서 학문과 교육이 발전했던 시기, 또 본받을 만한 학풍과 교풍을 지닌 외국 대학의 사례를 보면서, 대학이 가져야 할 상을 구상해보기도 했다. 민주화운동을 포함해서 사회운동이 한국 사회를 바꿔나갈 때에는 그런 구상이 실현될 것으로 기대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기대를 품은 대학인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학생, 직원, 교수가 모두 교육부와 재단의 통제 및 지배 대상으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대학개혁’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대학을 망친 결과다. 대학을 이렇게 만든 것은 대학 당국이고, 대학 당국을 관장하는 교육부이며, 교육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지배세력이다.

강내희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강내희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물론 세상은 바뀌게 되어 있고 바뀌어야 한다. 이 변화, 변혁을 주도할 주체는 누가 뭐래도 젊은 세대다. 나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3포’, ‘5포’, ‘7포’의 한계를 뛰어넘기를 바란다. ‘헬조선’을 저주하되 공포로 부들부들 떨지 말고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으면 싶다. 30년 전에도 세상을 바꾼 것은 젊은 세대였다. 정년퇴임을 미안한 마음으로 맞으며 내가 그래도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 대학, 사회가 이대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강내희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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