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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무책임한 대통령의 ‘파악되고 있다’ / 권혁철

등록 2016-03-06 21:36수정 2016-03-06 21:53

나는 4년째 내근을 하고 있다.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가 남이 쓴 기사 고치기다. 밭에는 농부가 밭고랑 사이에 흙을 올려서 만든 두둑한 밭이랑이 있다. 기사에도 글쓴이의 숨결과 판단이 담긴 고랑과 이랑이 있다. 남의 기사를 고치려면 글 고랑과 이랑을 허물어야 한다. 나는 이게 무척 부담스럽다. 되도록 남의 기사에 손대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주어가 빠진 피동형 표현은 능동형 표현으로 고친다. 흔한 피동형 표현은 이렇다. ‘파악된다’, ‘전망된다’, ‘판단된다’, ‘풀이된다’, ‘추정된다’, ‘예상된다’, ‘주목된다’….

기자들이 피동형 표현을 쓰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대부분은 습관이다. 너도나도 쓰다 보니 기자들 사이에서 마치 피동형 표현이 보도문장의 전형처럼 자리잡았다. 다음으로 기자가 제대로 사실관계나 근거를 확인 못했을 때다. 기자가 피동형이란 방패 뒤에 비겁하게 숨어서 추측을 불특정 다수의 의견이나 객관적 사실처럼 위장하려는 것이다.

기자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말과 글을 통해 자신의 뜻을 밝힌다. 대통령의 말과 글은 나라를 이끌어가니 더 막강한 힘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월16일 국회 연설에서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처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개성공단을 통해 지난해에만 1320억원이 들어가는 등 지금까지 총 6160억원의 현금이 달러로 지급됐다. 우리가 지급한 달러 대부분이 북한 주민들의 생활 향상에 쓰이지 않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노동당 지도부에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박 대통령의 발언 뒤 황교안 국무총리, 홍용표 통일부 장관도 개성공단 자금의 전용과 관련해 “파악되고 있다”는 피동형 문장을 반복했다. 정부는 누군지 모르지만 파악했으니 기정사실이라고 윽박지른다. 피동형 문장에서는 의견이 사실 행세를 한다. 도대체 개성공단 자금의 전용 사실을 누가 파악했다는 것인가. 대통령인가, 국가정보원인가, 통일부인가, 미국 중앙정보국인가.

말과 글에 주어가 없으면 책임도 없다. 특히 정치인들이 그렇다. 2007년 대선 때 ‘비비케이(BBK)와 무관하다’던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어느 대학 특강에서 “비비케이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고 직접 말한 동영상이 나왔다.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은 “주어가 빠졌다”며 ‘이명박 후보가 비비케이 설립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파악되고 있다’는 단순히 박 대통령의 말투의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의 인식과 판단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국정에 대한 무한책임이 있는 박 대통령이 국정 실패를 남 탓으로 돌리고 있다. ‘파악되고 있다’에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대통령의 속마음이 담긴 것이 아닐까.

김지영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신문·방송 보도 문장을 분석한 책 <피동형 기자들>에서 “피동형 표현은 무책임한 문장의 전형”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정체불명의 제3자에게 ‘풀이하고’, ‘관측하는’ 책임을 떠넘겨버렸다. 말의 메시지가 흐릴 수밖에 없다. … 물론 글을 읽는 이들은 그렇게 ‘풀이하고’, ‘관측하는’ 행위자가 글을 쓴 기자임을 안다”고 밝혔다.

권혁철 지역에디터
권혁철 지역에디터
김 전 국장의 글 형식을 빌리면, 박 대통령의 “파악되고 있다”는 발언은 무책임한 국정 운영의 전형이다. 박 대통령은 정체불명의 제3자에게 개성공단 자금 전용 사실을 ‘파악하는’ 책임을 떠넘겨버렸지만, 국민은 파악하는 행위자가 대통령임을 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앞으로 책임있게 일하려면, 말과 글에서 주어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혁철 지역에디터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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