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는 뒤집혔다. 안철수는 최소 목표치로 20석을 제시했는데, 호남 28곳 가운데 반타작만 해도 가능한 수치다. 비례대표 의석을 합치면 국민의당이 너끈히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리 찢기고 저리 갈라진 광주 사람들, 속이 편할 리 만무하다. ‘지역 1당’ 혼쭐냈더니 ‘호남 지역당’ 들어서게 됐다는 탄식이 길게 흐른다.
호남에 뿌리를 둔 새로운 교섭단체의 출현은 연쇄반응을 촉발하며 기존 정치 관행과 체제를 무너뜨리는 도미노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몰표 현상 해소가 대표적이다. 2당 경쟁 체제가 들어선 호남에서 더민주도, 국민의당도 몰표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영남의 지역주의는 호남의 몰표를 ‘알리바이’로 내세워왔다. ‘호남에선 저렇게 표를 몰아주는데 영남은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느냐’는 논리였다. 이제 호남의 몰표는 옛날 얘기가 됐다. 호남의 몰표를 이유로 영남의 ‘묻지마 새누리당 몰표’를 합리화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대구의 ‘총선 주연배우’ 유승민은 난감한 처지다. 일전을 벼르던 이재만이 링 위에 오르지도 못했으니 허공에 대고 분노의 주먹을 휘둘러야 할 판이다. 김무성이 ‘옥새투쟁’을 하지 않고 이재만의 공천장에 직인을 찍었다고 보자. ‘친박’에 내쳐진 유승민이 ‘진박’ 이재만을 난타하는 반전 드라마가 전국적 관심 속에 절찬 상영됐을지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의 ‘뒤끝정치’에 넌더리 내고, ‘새누리당 막장 공천’에 공분하는 폭발적 민심을 타고 유승민은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우뚝 올라설 기회를 잡았을 거다. 그런데 김무성은 이재만을 주저앉히며 유승민에게 찾아온 이 절호의 기회를 박탈해버렸다. 유승민이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크는 걸 막으려는 고도의 정략적 노림수였는지, 옛 동지에 대한 의리였는지는 오로지 김무성만이 알 것이다.
어쨌든 유승민은 이재만을 꺾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숙제를 짊어지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과 맞짱 뜬 천하의 유승민이 대구에서 더민주 후보를 꺾었다고 환호작약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뭔가 실력을 내보여야 할 판이니, 유승민으로선 ‘진박’에 밀려 무소속 출마한 류성걸, 권은희를 집중 지원해 반드시 당선시켜야 한다는 부담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간신의 모함에 넘어간 임금에게 미운털이 박혀 삭탈관직당한 채 ‘백의종군’하는 충신의 이미지를 차용하려 했을까. 유승민은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함께 출마한 류성걸, 권은희와 흰색 점퍼 차림으로 복장을 통일했다. 백색으로 ‘깔맞춤’한 ‘백의연대’에 대구의 민심이 어떻게 호응할지 선거운동이 막 시작된 지금으로선 가늠할 도리가 없다.
유승민은 심야의 탈당 기자회견에서 ‘정의’란 단어를 여덟 차례나 언급했다. 짓밟힌 정의에 분노를 표시하며 국민의 정의로운 마음을 믿고 정의를 위해 출마하겠노라고 숙연하게 다짐했다. 부활절 대구연합예배 방명록엔 ‘정의를 위해서’라고 썼다. 유승민이 총선 이후 받아들 성적표가 ‘나홀로 무혈입성’에 그친다면 새누리당에 복귀하기도, 독자세력화를 꾀하기도 애매한 어중간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가 목놓아 외친 정의는 모깃소리처럼 가냘픈 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대구에선 김부겸도 고군분투 중이다. 김부겸과 ‘영호남 세트’로 묶인 이정현이 호남에 새누리당 깃발을 꽂았을 때 대구에선 ‘우리가 화답할 차례’란 말들이 흘러나왔다. 대구지역 지식인 1033명은 30일 “이번엔 새누리당 싹쓸이를 막아달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부산에선 정의화 국회의장이 새로운 정치결사체 결성을 언급했다. 뭔가 판이 흔들릴 조짐이 엿보인다. 이제 대구시민이 응답할 차례 아닌가?
임석규 총괄기획 에디터 sky@hani.co.kr
임석규 총괄기획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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