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소방차

등록 2016-04-04 20:47

전우용/역사학자
전우용/역사학자
만사를 제쳐두고 서둘러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화급’(火急)이란 말을 쓴다. 작은 불이라도 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기에, 불 끄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다. 나무와 짚과 종이로 만든 집에서 나무와 짚을 때며 살았던 옛날에는 화재가 잦았고, 이런 집들이 밀집한 도시에서는 한 집에서 일어난 불이 동네 전체를 잿더미로 바꾸는 일이 흔했다. 세종 8년(1426) 2월, 서울에 큰불이 나 행랑 106칸과 민가 2170호가 소실되고 30명이 사망했는데, ‘타 죽어 재가 된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무렵 서울에 있던 행랑과 민가의 대략 10분의 1이 타버린 셈이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강 건너편에서 난 불이 아닌 이상, 한 집에 불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물동이를 들고 달려가 꺼야 했다.

옛날 불 끄는 일은 모든 사람의 의무였다. 불은 부잣집과 가난한 집을 차별하지 않았고,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이웃집 사이에 놓인 담장도 쉽게 넘었다. 불난 이웃집에 부채질했다가는, 그 집의 불티가 제 집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물론 화재의 발견과 진압을 맡은 정부 기관도 있었다. 세종은 금화도감(禁火都監)이라는 임시관서를 설치했고, 성종은 이를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라는 상설관서로 만들었다. 남대문과 동대문의 2층 문루에서 병사들이 성 안을 굽어보다가 화기를 발견하면 종을 쳐 알렸다. 그런데 궁궐에 화재가 났을 때는 ‘어느 동네 누가 불 끄러 오지 않았는지’까지 사후 조사하게 했으나, 민가의 화재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1915년, 살수 펌프가 달린 커다란 물탱크를 실은 소방차가 남대문소방서에 배치되었다. 이후 불 끄는 일도 차츰 ‘전문가’의 일이 되어갔다. 현대인들은 불 난 이웃집에 달려가 함께 불을 끌 능력과 의지를 모두 잃은 사람들이다. 더불어 남의 재앙을 자기 재앙으로 받아들이는 마음도 엷어졌다. ‘나만 아니면 돼’를 금과옥조로 삼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 어느 방송사 예능 프로그램의 몰인정한 대사 때문만은 아닐 터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