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역사학자
만사를 제쳐두고 서둘러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화급’(火急)이란 말을 쓴다. 작은 불이라도 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기에, 불 끄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다. 나무와 짚과 종이로 만든 집에서 나무와 짚을 때며 살았던 옛날에는 화재가 잦았고, 이런 집들이 밀집한 도시에서는 한 집에서 일어난 불이 동네 전체를 잿더미로 바꾸는 일이 흔했다. 세종 8년(1426) 2월, 서울에 큰불이 나 행랑 106칸과 민가 2170호가 소실되고 30명이 사망했는데, ‘타 죽어 재가 된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무렵 서울에 있던 행랑과 민가의 대략 10분의 1이 타버린 셈이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강 건너편에서 난 불이 아닌 이상, 한 집에 불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물동이를 들고 달려가 꺼야 했다.
옛날 불 끄는 일은 모든 사람의 의무였다. 불은 부잣집과 가난한 집을 차별하지 않았고,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이웃집 사이에 놓인 담장도 쉽게 넘었다. 불난 이웃집에 부채질했다가는, 그 집의 불티가 제 집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물론 화재의 발견과 진압을 맡은 정부 기관도 있었다. 세종은 금화도감(禁火都監)이라는 임시관서를 설치했고, 성종은 이를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라는 상설관서로 만들었다. 남대문과 동대문의 2층 문루에서 병사들이 성 안을 굽어보다가 화기를 발견하면 종을 쳐 알렸다. 그런데 궁궐에 화재가 났을 때는 ‘어느 동네 누가 불 끄러 오지 않았는지’까지 사후 조사하게 했으나, 민가의 화재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1915년, 살수 펌프가 달린 커다란 물탱크를 실은 소방차가 남대문소방서에 배치되었다. 이후 불 끄는 일도 차츰 ‘전문가’의 일이 되어갔다. 현대인들은 불 난 이웃집에 달려가 함께 불을 끌 능력과 의지를 모두 잃은 사람들이다. 더불어 남의 재앙을 자기 재앙으로 받아들이는 마음도 엷어졌다. ‘나만 아니면 돼’를 금과옥조로 삼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 어느 방송사 예능 프로그램의 몰인정한 대사 때문만은 아닐 터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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