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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부치지 못한 편지 / 배경내

등록 2016-04-11 19:30수정 2016-04-12 08:58

“제가 살인자 같은 거예요. 살인자의 편지를 받는 거니까 많이 힘들겠다, 그냥 가지고 있는 게 낫겠다.” 애써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승객을 구조했던 생존 학생. “이 형아가 너 살릴게.” 여섯 살 남자아이에게 건넨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 어린이는 아직 차가운 바닷속에 있다. 편지로나마 그 아이의 홀로 남은 여동생에게 오빠의 마지막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차마 부치진 못했다. 살려야 했고 살릴 수도 있었던 이들은 모르쇠로 돌아앉아 떳떳한데, 죽을힘을 다해 살리려 했던 이는 죄책감과 한 몸이 된 채 두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부치지 않은 편지>의 한 자락처럼 시린 4월이 왔다. 원폭 생존자들을 연구한 로버트 리프턴은 죄책감을 ‘재난으로부터 유용한 교훈을 이끌어내고 힘을 되찾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무력하기만 한 현실에 직면하는 것보다 견디기 쉬울지도 모른다.” 나는 생존 학생과 유가족 형제자매들을 인터뷰하면서 이 말의 의미를 곱씹게 되었다. 나만 살아 미안하고, 옆 사람이 힘들어질 걸 알기에 내가 힘든 게 미안하고, 떠난 친구와 형제자매에게 말해줄 진실이 없어 미안하고, 어려서/학생이라서 할 수 있는 걸 찾기 힘들었기에 미안하다는 사람들. “할 수 있는 걸 해야죠.” 이들은 그 숱한 미안함에 뒤척이면서도 죄책감에 온전히 압도되지 않았으며, 그만큼의 책임감을 힘껏 끌어안고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구체적 존재, 구체적 기억, 구체적 책임감과 결합된 죄책감은 아름답고 강인했다. ‘애들, 학생, 자식, 어린 피해자’로만 존재해왔던 이들이 세월호 참사가 빚어낸,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빚어낸 세상을 어떻게 겪어냈는지가 담긴 <다시 봄이 올 거예요>는 이들이 지금껏 부치지 못한 채 간직하고 있던 마음의 편지이기도 하다.

나는 ‘세월호 피로증’이 피해자들에 대한 ‘동정피로’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깊은 통찰이든 찰나의 간파든, 그날, 저 참극이 나에게도 들이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암시는 선명했다. 외면당하는 진실과 달아나는 책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어쩌면 지금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우리의 처지를 자꾸만 떠올리게 만든다. 동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자각. 동정이 피곤한 게 아니라 직면이 두렵다. 세월호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착각 역시 기억을 과거에 봉인한다. 동정이 아닌 봉인된 기억이 지겨움을 불러온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내 일이라는 자각에 대한 계몽이나 막연한 기억의 다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구체적인 이야기와 더 많이 연결되어 함께 흔들릴 기회일지도 모른다.

배경내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배경내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내가 평소 존경하고 흠모하는 한 청소년모임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4·16 실천단을 꾸렸다. 아직도 만나야 할 사람과 알아야 할 이야기가 많기에 올해도 안산과 팽목을 찾아 길을 나섰다. 나 역시 무력감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무력감과 싸웠을 세월호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에 나는 덜 무기력해졌다. ‘저들의 임기는 몇 년이지만 우리의 임기는 죽을 때까지’라는 10대들의 배짱을 만날 수 있었기에 더 구체적인 희망을 쏘아올릴 수 있었다. 10대들을 판단하고 대해왔던 태도가 세월호의 가능성을 좁히고 세월호 피로증을 더 크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됐다. 할 수 있는 걸 하자. 먼저 세월호 10대들이 이제야 부쳐온 편지부터 읽자.

배경내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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