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2003년 4월29일 유시민 당선자가 의원 선서를 위해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오르자 한나라당 의원 수십 명이 그를 향해 “국회를 뭘로 보는 거야” 등의 소리를 지르면서 퇴장해 버렸다. 한나라당 의원들을 격분시킨 것은 넥타이를 매지 않고 면바지에 재킷을 입은 그의 복장이었다.
장면 둘. 2016년 4월, 전남 순천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한 이정현이 지역구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넥타이를 풀고 양복을 점퍼와 면바지로 바꿔 입는 것이었다. 여야를 불문하고 후보자들 대다수가 넥타이를 매지 않고 유권자들을 만났다. 다행히 그들은 “유권자를 뭘로 보는 거야” 같은 항의는 받지 않았다. 이 두 장면에서 넥타이는 선거 전에는 서민인 척하다가 당선되면 극도로 권위적이 되는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여실히 드러내는 물건이다.
넥타이의 기원은 고대 중국 진나라와 로마 병사들이 목에 두른 천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도 상처를 싸매기 위한 용도였을 것이다. 상징성 외에는 아무 쓸모없는 넥타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7세기 프랑스 루이 14세 때였다. 파리에 온 크로아티아 병사들이 목에 두른 천에서 ‘멋’을 발견한 프랑스의 왕공 귀족들은 곧 그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뜻하는 프랑스어 크라바트(Cravatte)는 이에서 유래했다. 이 목수건의 모양은 의복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변했는데, 요즘과 같은 모양의 넥타이가 나온 것은 1890년경이었다. 넥타이는 처음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목만을 휘감았으나, 시민혁명으로 신분제가 해체된 뒤에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목도 졸랐다. 한국인 중에서는 1883년에 서광범이 처음 넥타이를 맸다. 고종도 연미복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넥타이가 새로운 사회 신분인 ‘신사’의 보편적 표지가 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현대 남성들에게 넥타이는 공과 사, 권위와 탈권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격식과 소탈, 위너와 루저의 경계를 표시하는 물건이다. 이 물건의 차별적 상징성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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