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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냄비

등록 2016-05-09 19:22

“서울 명물 설렁탕이 어떤 것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콩멍석만한 김 서리는 가마 속에 소 대가리가 푹 솟아있다. 그 옆에는 죽어서도 악착한 희생을 당하였다는 듯이 소 해골바가지 서너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리고 또 한편에는 신사 양반들이 모지라진 숟가락으로 뚝배기 바닥을 달그락달그락 긁으면서 국물을 훌훌 마시며 하는 말씀. ‘어, 이제 속이 풀리는군!’ 소 대가리 삶은 물 먹어 저렇게도 좋을까?”(<별건곤> 1932. 4.) 1932년 전문학교 입시를 위해 상경한 시골 학생의 서울 인상기 중 한 대목이다. 그런데 소 대가리는 가마솥 안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내고서야 해골바가지가 됐을까?

세계 각국의 음식에 대해 깊은 조예를 지녔다고 자부하는 한 지인은 한국 음식의 맛이 장과 육수에 좌우된다며 세계에서 가장 긴 조리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게 한국 음식이라고 단언했다. 메주를 띄워 장을 담가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 반년 정도, 육수를 만드는 데에는 보통 2~3일이 소요된다. 뭉근한 불로 천천히 끓이는 조리법은 옛날 한국의 주된 조리도구인 가마솥과 뚝배기에 잘 어울린다.

오늘날 가마솥과 뚝배기를 대신해 한국인의 주방을 차지한 주된 조리도구는 ‘냄비’이다. ‘타바코’라는 말이 일본을 거쳐 들어와 ‘담배’가 된 것처럼, 일본어 ‘나베’가 들어와 남배, 남비, 냄비 등으로 변한 것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이를 ‘왜요’(倭)로 표기했다. 이동식 작은 솥인 요()는 우리말로 ‘쟁개비’인데, 그럼에도 ‘왜쟁개비’ 대신 냄비가 표준어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이 조리도구의 속성이 가마솥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한국인들은 ‘15분 만에 완성되는 한식’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1960년대에 조윤제는 ‘은근은 한국의 미(美)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라고 했으나, 지금도 맞는 말일까? 가마솥을 주로 쓰던 사람들이 은근히 끓고 천천히 식는 성정을 지녔다면, 냄비를 주로 쓰는 사람들이 빨리 끓고 빨리 식는 성정을 지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일 터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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