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이래, 사람의 몸은 여러 벌레들의 서식처이기도 했다. 이, 벼룩, 빈대, 진드기 등은 사람의 몸 위에서 사람의 피를 빨며 신체의 당연한 일부인 양 행세했다. 이 중에서도 빈대는 사람을 매우 괴롭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속담이 생겼고, 요즘도 남의 ‘피 같은 돈’을 빨아먹는 행위를 가리켜 ‘빈대 붙는다’는 말을 쓴다. 인류는 수십만년 동안 이 귀찮은 벌레들을 몸에서 내쫓으려 애썼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온몸 구석구석을 깨끗이 씻어도 그때뿐, 옷, 베개, 이불 등으로 잠시 피신했던 벌레들은 곧 자기 영토를 수복했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미군은 엄청난 양의 디디티(DDT)를 가지고 한반도에 진주했다. 그들은 한국인과 안심하고 접촉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의 몸에 서식하는 벌레들을 박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반년쯤 지난 1946년 2월, 서울 광화문에 있던 군정청 위생국 화학연구소는 디디티를 자체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소 쪽은 이에 대해 ‘일본 의약계에서도 오랫동안 만들려고 연구했으나 숙제로 남아 있던 것을 우리 연구진이 성공시킨 쾌거’이며 ‘새 조선의 화학 연구진이 개가를 올린 것’이라고 자찬했다.
이후 30년간, 한국인들은 수시로 디디티 세례를 받았다. 특히 전쟁 중에는 물 목욕보다 디디티 목욕을 더 자주 했다. 미군정 당국자들은 디디티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한국인 대다수는 이를 ‘기적의 약’으로만 받아들였다. 디디티가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1970년대 초부터는 다른 화학물질들이 벌레 박멸 작전을 떠맡았다.
화학물질들은 햇볕이 잘 들고 깨끗한 물이 나오는 집과 연합 작전을 펼쳐 몸에 벌레가 서식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인간이 수십만년 동안 공존했던 파트너와 결별하기 위해 새로 맞아들인 파트너가 앞으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인간이 화학물질과 친해진 지는 아직 100년도 채 안 됐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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