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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하버드에 간 홈리스 딸 / 전정윤

등록 2016-05-17 19:14수정 2016-05-17 19:14



국내에서 ‘금수저’에게 유리한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학종) 논란이 한창이다. 한국 학종의 모태인 입학사정관제를 실시하는 미국에서는 최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큰딸 말리아가 하버드대를 낙점했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딸은 스탠퍼드대에 입학했다. 조지 부시의 쌍둥이 딸은 아버지의 모교 예일대와 아버지의 정치적 고향에 있는 텍사스대를 선택했다. 미국에서 유력 정치인이나 재력가의 자녀가 명문대를 골라 가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소수자 우대정책이 잘 정착돼 있다곤 하나, 정성평가를 중시하는 입시제도는 미국에서도 금수저들을 더 우대한다.

“노력이 환경을 이긴다”는 주류의 충고를 입증하듯 기회를 쟁취하는 ‘흙수저’는 어디나 있다. 미국에는 극적인 예로 2009년 20여개 명문대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하버드로 간 홈리스 소녀가 있었다. 하버드 입학사정관이 학교 당국에 “그녀를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제2의 미셸 오바마를 놓치는 실수”라고 경고했을 정도였다.

카디자 윌리엄스, 어머니가 홈리스였고 아버지는 누군지 몰랐다. 열네살이 많은 엄마를 따라 떠돌며 초중고 12년간 12번 전학을 다니다 하버드에 입학했다. ‘아이 캔 두 잇’ 신화의 전범을 발견한 미국은 열광했다. 변호사가 되겠다던 카디자는 최근 워싱턴 디시(D.C)의 교육 공무원이 돼 홈리스 아이들을 돕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노력으로 꿈을 이뤘다는 ‘신화 같은 실화’는 많은 이들을 자성으로 이끈다. 하지만 금수저가 아니어도 최선만 다하면 하버드로 상징되는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채찍질’의 끝에는 오아시스가 아닌 신기루가 있을 공산이 크다. 조악한 통계를 만들어보자면 20여년간 재임한 세 미국 대통령의 자녀 5명 중, 어린 사샤 오바마를 뺀 4명이 명문대에 진학했다. 100%다. 미국에는 12만3천명의 아이들이 홈리스로 추산된다. 카디자 같은 사례는 카디자 1명, 0.0008%다. 그 전에도 후에도 비슷한 사례는 알려진 게 없으니, 확률은 더 낮아질 것이다.

홈리스보다 형편이 낫다고 해서 보통 아이들의 성공 확률이 0.0008%에서 100%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진 않는다. 카디자가 바늘구멍을 뚫은 과정은 범인의 한계를 벗어난 위인의 영역에 가깝다. 카디자는 초등학교 때 캘리포니아주 상위 1%에 드는 영재였다. 거리에서도 한 달에 네댓 권의 책을 읽고, 뉴욕의 모든 신문을 정독할 정도로 공부를 좋아했다. 대학은 꿈도 꾸지 말라는 조롱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매일 새벽 4시에 등교해 밤 11시에 하교했다. 홈리스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아이들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증가와 뇌 손상 등 회복하기 힘든 트라우마 탓에 정상 발달이 어렵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물질계의 이런 ‘자연 현상’마저 극복한 카디자는, 정신력의 천재였다.

전정윤 국제뉴스팀 기자
전정윤 국제뉴스팀 기자
한국에서도 카디자가 대입 자기소개서 모범답안으로 언급되지만, 미국 천재의 신화는 한국의 보통 아이들한테 채찍이 될 수 없다. 다만 카디자의 재능과 노력을 뒷받침한 미국의 교육 제도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카디자는 토론 동아리와 육상팀 등 다양한 ‘교내 활동’에 참여했다. 교사는 성심성의껏 추천서를 썼고, 대학은 이를 인정했다. 카디자가 새벽 4시에서 밤 11시까지 학교에 있었던 건 학교 안에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17시간씩 노력하면 하버드도 갈 수 있다고 독려하기 전에, 수능이든 학생부든 대입 전형부터 학교 교육과 활동에 최적화시키는 것, 수저 차별의 폐해를 줄이는 ‘대입 정상화’의 첫걸음이다.

전정윤 국제뉴스팀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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