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 역사학자
1905년 한국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공적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한편, 나라는 망해도 저는 잘돼야겠다는 한국인들에게 ‘보물’을 받아 사복을 채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한국의 보물 중에서도 특히 좋아한 것은 고려청자였다. 이 소문이 돌자 고려청자는 황제의 하사품보다도 귀해졌다. 어느 날 이토는 고종에게 청자 하나를 선물했다. 고종은 “이런 물건은 처음 보는데, 어디 소산이오?”라고 물었고, 이토가 외려 “귀국 전 왕조 시대의 물건이외다”라고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문화재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인데, 대략 ‘민족 또는 지역 문화의 정수를 간직한 옛 물건’ 정도의 뜻이었다. 근대 국민국가와 함께 출현한 문화재는 어느 나라에서나 자국의 유구한 역사와 자국민의 탁월한 문화역량을 증언하는 물건으로 취급되어 국가 책임하에 보존, 관리되었다. 그런데 식민지에서는 문화재의 가치조차 지배 민족의 눈으로 평가되었다. 일제의 관제 역사학은 ‘반도의 문화는 고려조까지는 볼만한 것이 조금 있었으나 조선조 이후 퇴폐일로를 걸었다’고 주장했고 이런 역사관은 문화재를 보는 눈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3년 12월5일 조선총독부는 ‘조선 보물 고적 명승 기념물 보존령’을 공포하고 212점의 건조물, 공예품 등을 조선보물로 지정했다. 조선보물은 해방 후 ‘국보’로 격상되었으나, 사람들은 관(官) 지정 여부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문화재보호법은 1962년 1월에야 제정되었는데, 이때 문화재의 종류를 국보, 보물, 사적 등으로 나누고 소재지별로 관리번호를 붙였다. 숭례문, 원각사탑, 진흥왕순수비가 1, 2, 3호인 것은 서울에 있기 때문이며, 석굴암이 24호인 것은 경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은 국보 1호가 다른 국보들에 비해 월등히 중요하다고 믿는다. 무엇이든 등급을 나누고 1등만 기억하는 문화의 소산일 터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사람 목숨에조차 등급을 붙이는 게 자연스럽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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