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팀 기자 “사실상 신공항”이라는 청와대 신조어는 다양한 용례를 만들어낸다. 신공항이 아닌 것을 신공항으로 부르고 싶은 정신승리의 어떤 방식이자, 언어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창조언어의 한 모범이다. 가령 여론조사에서 10명 중 3명 정도만 지지하지만 그래도 임기는 1년8개월이 남았다는 의미에서 “사실상 대통령”이라는 표현도 가능하게 됐다. 청와대 덕이다. 사실상 대통령이라니, 대통령을 대놓고 오리에 비유하는 미국식 정치용어 ‘레임덕’에 견주면 얼마나 은근한가. 게다가 무한으로 수렴해보지만 끝내 궁극에 가닿지 못하는 아스라함마저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앞으로 인용부호 속 “김해신공항”이 아닌 현실의 김해신공항에 착륙할 일은 없을 것이다. 29일 오늘은 대통령 직선제를 뼈대로 한 1987년 9차 개헌의 시작을 알린 6·29 선언이 나온 지 29년째 되는 날이다. 그 유명한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연원은 1948년 제헌헌법을 거슬러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까지 올라간다. 상해(상하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이 만든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조선이라는 500년 군주국에 대한 집단기억을 공화국으로 바꿔놓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나라 헌법이 이런 식은 아니다. 독일 기본법(헌법)은 인간 존엄의 훼손 불가능을 천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존엄은 불가침이다.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책임이다.’ 우리 헌법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제10조에 가서야 등장시키는 것과 사뭇 대비된다. 독일의 그것에 견줘 우리 헌법이 인권이나 기본권을 덜 중시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1949년에 만들어진 독일 기본법에는 아마도 전쟁, 광기, 홀로코스트를 불러온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깊은 반성을 담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니 국가보다 인간을 의식적으로 앞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만들어진 1919년 제정된 독일 바이마르 헌법은 ‘독일은 공화국이다’를 제1조로 삼았었다. 아무리 좋은 헌법이라도 나치의 발호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권력의 소실점이 보이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정치권에서 개헌 얘기가 쏟아진다. 이왕 바꾼다면 헌법 첫 줄을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밝히는 독일식으로 폼 나게 바꿔볼 수도 있겠다. 민주공화국 대신 모든 사람은 꽃처럼 아름답다는 식으로 말이다. 문제는 폼도 여유 있을 때 잡아야 폼이 난다는 데 있다. 지금 한가하게 폼이나 잡을 때냐 이 말이다.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때 절실했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적 선언이 지금이라고 절실하지 않다는 거냐 이 말이다. 우리는 ‘사실상 민주공화국’, 테마파크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지 않은가. ‘레알’ 민주공화국의 시민이라면 굳이 헌법 조문을 노래로 만들어 집회·시위 현장에서 부르다 물대포 맞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집권 여당 유력 정치인이 자당 소속 대통령에게 헌법 조문을 읽어주며 그 가치를 일깨우는 일도 더더욱 없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도드라지는 희극성을 애써 참는 이라도, 북한 사회주의헌법이 특유의 과장되고 장황한 서문을 거쳐 내놓은 제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한다’에 이르면 빵 터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각자의 헌법 제1조를 대하는 태도부터 사실상 한민족이다. 청와대의 “사실상”이라는 말은 실상은 아니지만 짐짓 그렇다고 해두자는 퇴행의 언어다. 그래서 사실상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높은 추상에서 아스팔트로 내려와 촛불과 함성을 통해 시민의 참요가 될 수밖에 없나 보다.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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