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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최선희의 항변 / 이제훈

등록 2016-07-03 17:52수정 2016-07-03 20:58

이제훈
통일외교팀장

첫날 오후 회의가 끝났다. 저녁 먹으러 갈 시간이다. 그때 그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남측에서는 그런 식으로 언론에 흘립니까?” 6월22일 베이징 제26차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 회의장의 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이다. 그는 이 회의의 언론 대응 원칙인 ‘채텀 하우스(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룰’을 상기시켰다. ‘회의장에서 오간 얘기를 외부에 전할 수 있지만, 발언자가 누구인지 공개해서는 안 된다’가 핵심이다. ‘정보 공유’와 ‘자유토론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밀 유지’ 사이의 균형 맞추기다. 김건 외교부 북핵외교기획단장이 북한의 무수단 미사일 발사를 비난했는데 최 부국장이 반발하지 않았다는 남쪽 언론의 ‘베이징 소식통’을 인용한 기사가 그날 오전 11시45분에 인터넷에 실린 걸 문제삼았다.

사실 최 부국장은 회의 첫날 발언을 자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각국 대표들이 최 부국장을 상대로 6자회담에 대한 북한의 방침을 거듭 확인하려 했을 때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마지못해 “9·19 공동성명의 정신이 훼손됐으니 새로운 틀을 모색해야 한다”고 답했을 뿐이다. 그런 그가 첫날 회의가 끝난 시점에 굳이 발언권을 얻으려 한 배경에, 남쪽 언론 기사를 인터넷으로 본 평양 쪽의 ‘적극 대응’ 훈령이 있었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부 대표와 학자가 뒤섞인 반관반민(1.5트랙) 형식의 이 회의엔 6자회담 참가국 모두가 수석 또는 차석 대표를 보냈다. 북한 정부 대표의 참가는 2012년 이래 4년 만,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 참석은 2006년 이래 10년 만이다. 북-미 양자 접촉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존 커비 미 국무부 대변인은 6월23일(현지시각) 관련 질문에 “그(성 김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최 부국장을) 만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커비 대변인은 “He did not meet with him”이라 표현했는데, 여성인 최 부국장을 남성으로 오인한 것이다.) 사실은 성 김 대표와 최 부국장은 22일 만찬 때 헤드테이블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식사 도중 대화도 있었다.

최 부국장은 6월23일 회의 마지막 세션에 불참했다. 오전 9시10분 숙소인 옌치후 국제회의장을 떠나 오전 10시40분 베이징 시내 북한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있어 조선은 비핵화 문제를 논의할 상황이 아니다”라고 했다. 무수단 발사 성공이 “대단히 기쁘다”고도 했다. 협상을 통한 ‘핵문제’ 해결, 곧 6자회담 재개를 바라온 이들을 낙담케 하는 발언이다. 그런데 최 부국장은 왜 “6자회담이 사멸했다는 건 제가 한 말이 아니고”라고 단서를 달아, 이미 다 알려진 북한의 공식 견해를 기자회견까지 자청하며 재방송해야 했을까? 전날 밤 한국 언론이 일제히 ‘대북 소식통’을 인용해 최 부국장이 “6자회담은 죽었다”고 말했다고 대서특필한 것과 무관하다고 하기 어렵다. 다음날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국회에서, ‘제재와 함께 대화·협상을 병행하라’는 야당 의원들의 압박에 맞서는 방패막이로 최 부국장의 기자회견을 십분 활용했다.

6월22일 ‘소식통’을 인용한 한국 언론의 두 차례 보도가 없었다면 최 부국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하는 일이 없었을까? 모르겠다. 최 부국장은 남쪽 대표단의 ‘언론 플레이’를 따졌고, 남쪽은 대화 부재 상황이 ‘북한 탓’이라고 돌렸다는 건 안다. 하지만 상호 비난이 대화와 협상의 씨를 뿌리고 공존과 평화의 싹을 틔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한 탓’만 하며 넋 놓고 있기엔 삶이 너무 고달프지 않은가?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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