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도 탐이 났더란 말이냐?” 1913년에 초연된 신파극 <장한몽>에 나온 대사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도 농반진반으로 입에 올리곤 하는데, 속설이 맞는다면 100년이 넘도록 대중의 공감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은 희귀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중환이 일본 소설 <곤지키야샤>(金色夜叉)를 번안한 원작 <장한몽>에는 이런 대사가 없다. 1913년 시점에 다이아몬드가 무엇인지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에도 금강석이라는 말은 있었으나 동양 전설 속의 기린과 마찬가지로 전설 속의 물건이었다. 전설 속의 기린이 ‘외뿔과 사슴의 몸, 소의 꼬리, 말의 발굽과 갈기를 갖춘’ 신수(神獸)로서 ‘Giraffa camelopardalis’가 아니었듯, 전설 속의 금강석도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돌’이었을 뿐 ‘무색의 탄소 결정체’인 다이아몬드는 아니었다. 별빛 같은 광채와 영원불멸의 속성은 그 자체로 ‘신성’(神性)이었기 때문에, 보석은 오랫동안 ‘신에게 가까이 있는 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다이아몬드가 루비, 에메랄드 등을 제치고 보석의 왕좌를 차지한 것은 베네치아의 V. 페루치가 연마법을 발명한 17세기 말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금강석이라는 말이 다이아몬드라는 실체와 결합한 것은 19세기 말이나, 이 말을 쓴 사람들이 이 보석을 직접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1920년, 이왕가는 영친왕과 결혼할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에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 팔찌, 화관을 예물로 보냈다. 이것이 다이아몬드가 왕실 가례 예물로 사용된 첫 사례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는 큰 부잣집 사모님이나 기생, 배우 등 특별한 여성들만이 끼는 물건이었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일반인들에게조차 필수적인 결혼예물처럼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인데, 이 무렵부터 이혼율도 계속 높아졌다. 영원불멸의 신성을 ‘관계’가 아니라 ‘물질’에 부여한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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