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인류가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한 것이 몸을 가리기 위해서였는지 마음(수치심)을 가리기 위해서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이후 옷은 ‘인간다움’의 확실한 표지가 되었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으면 문명인, 그러지 않으면 야만인, 안 입으면 짐승이라는 구분법은 사람들의 의식 안에 면면히 이어져 왔다. 1885년 서울 주재 일본영사관이 자국민에게 발한 지시사항 제2호는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녀 제국(帝國)의 체모를 손상시키지 말 것”이었다. 직기(織機)는 고대 이집트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진보 속도는 무척 더뎠다. 250여년 전까지는 식물의 줄기나 동물의 털에서 뽑아낸 섬유로 가는 실을 만드는 일, 수백 가닥의 실을 직기에 세로로 가지런하고 올곧게 걸어 고정시키는 일, 세로실의 위아래로 번갈아가며 가로실을 교차시키는 일 등이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대다수 문화권에서 직조는 여성의 일이었는데, 조선시대 직기로 베 한 필을 짜기 위해서는 베틀 앞에서만 꼬박 열흘 정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세종 대 기준으로 한 필은 가로 32.8㎝, 세로 16m38㎝였다. 여기에 그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실잣기뿐 아니라 다른 가사노동을 겸해야 했으니, 1년 내내 짬날 때마다 베틀 앞에 앉아 일해도 예닐곱 필을 짜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그중 두 필은 국가가 군포(軍布)로 징수했다. 한 필로 어른 옷 한 벌 정도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남은 것으로는 1년에 식구들 옷 한 벌씩도 해 입히기 어려웠다. 산업혁명은 직조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733년 플라잉셔틀이라는 혁명적 수직기가, 1785년에는 증기의 힘을 이용한 역직기가 발명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역직기를 이용한 직조가 본격화한 것은 1919년 조선방직이 610대, 이듬해 경성방직이 100대를 들여온 이후이다. 현대인들은 직조혁명 덕에 옛날 왕보다도 더 자주 새 옷을 장만하지만, 늘 입을 옷이 마땅치 않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물질 생산의 증가 속도보다도 물질에 대한 욕망의 증가 속도가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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