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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어요

등록 2016-07-15 19:08수정 2016-07-18 11:04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가 전하는 말
기러기

-메리 올리버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어요.

사막을 가로지르는 백 마일의 길을

무릎으로 기어가며 참회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당신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두어요.

절망에 대해 말해보세요, 당신의 절망을, 그러면 나의 절망을 말해줄게요.

그러는 동안 세상은 돌아가죠.

그러는 동안 태양과 맑은 빗방울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나아가요,

넓은 초원과 깊은 나무들을 넘고

산과 강을 넘어서.

그러는 동안 맑고 푸른 하늘 높은 곳에서

기러기들은 다시 집을 향해 날아갑니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당신의 상상력에 자기를 내맡기고

기러기처럼 그대에게 소리쳐요, 격하고 또 뜨겁게 -

세상 만물이 이루는 가족 속에서

그대의 자리를 되풀이 알려주며.

*시집 <꿈 작업>(Dream Work, 1986), 신형철 옮김

나는 자연에서 배운 것이 별로 없다. 자연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수업에 관한 한, 나는 스스로를 반항아라고 믿는 열등생에 불과했다. 자연이 제공하는 평범한 지혜에 과도하게 감격하는 장년층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들을 은근히 무시해온 때가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좋지 않은 것’이라 속단하는 풋내기 시절을 벗어난 지금은 자연에 대해서도 겸허해졌다. 앞으로 나와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지난 40여년 동안 자연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으나 머지않아 눈과 귀가 열릴까.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메리 올리버 같은 시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의 시 한 편을 나는 내 식대로 좋아해 왔다.

메리 올리버는 1935년생 미국 시인이다. (같은 해에 태어난 미국인으로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우디 앨런이 있다.) 14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1963년에 첫 시집을 냈으며 사십대 후반에 시집 <아메리칸 프리미티브>(American Primitive·1983)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수상 이후의 첫 시집 <드림 워크>(Dream Work·1986)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시 ‘기러기’가 수록돼 있다. “그녀의 시 ‘기러기’는 너무도 유명해져서 이제 전국의 기숙사 방들을 장식하고 있다.” 이것은 <보스턴 글로브>(2007.9.2)에 게재된 글의 한 대목인데, 발표 이후 20년 동안 이 17행(원문 기준)의 자유시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국에는 2004년 책인 <완벽한 날들>(마음산책, 2014)이 처음으로 번역되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기러기’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보다 먼저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자연에 대한 잠언 시집>(나무심는사람, 1999)에 최초로 소개되었고, 이후 소설가 김연수가 이 시의 열세 번째 행을 제목으로 삼은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2007)을 출간하면서 유명해졌다. 이후 발표된 인하대 박혜영 교수의 칼럼(<한겨레>, 2009.7.18), 또 같은 대학 정은귀 교수의 논문(‘생태시의 윤리와 관계의 시학-메리 올리버의 다른 몸 되기’, 2010)에도 ‘기러기’에 대한 훌륭한 논평이 담겨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자연이 부여한 자신의 본성에 따라 생을 살아가지만 인간은 자연이 부여한 본성과 한계를 억누르거나 아니면 뛰어넘으려 한다. 하지만 시인은 자연의 길을 따라가는 다른 존재들처럼 인간도 그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결국 자연의 일부이며, 따라서 인간의 길도 기러기와 마찬가지로 다른 피조물들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박혜영) 보다시피 이 시는 모범적인 ‘생태시’로 읽힐 여지를 품고 있다. “홀로 제멋대로이면서 또 동시에 함께 호흡하는 관계, 온갖 사물의 무리들 안의 존재의 자리, 이것이 올리버가 열어 보이는 ‘관계적 자아’의 바람직한 자리”(정은귀)라는 논평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시의 생태주의적 세계관 말고 다른 측면에 주목하고 싶다. 미국의 많은 학생들이 기숙사 방 벽에 이 시를 붙여놓았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이 시에 담겨 있는 일종의 테라피적 효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이미 느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 힘을 명료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가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어떤 시와 만난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나는 이 시를 읽은 미국과 한국의 독자들이 그와 유사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런 힘은 첫 두 문장에서부터 이미 발휘된다.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어요. 사막을 가로지르는 백 마일의 길을 무릎으로 기어가며 참회할 필요도 없어요.” 이 구절에는 확실히 반종교적 뉘앙스가 있다. 자신이 따르는 도덕적 이상에 오히려 억압당해서 자신을 언제나 죄인 취급 하고 고행에 가까운 참회를 각오하는 어떤 ‘종교적’ 독자에게 이 시는 그것이 어리석은 자기학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의 호소력은 그보다 더 보편적이다. 자신이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책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고질적 습관이 아닌가. 이 시의 도입부는 바로 그런 대다수 독자의 자학적 자의식을 바로 옆에서 들리는 음성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리고 인상적인 조언이 이어진다. “그저 당신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두어요.” ‘착해지기’나 ‘참회하기’에 대한 강박은 제 자신을 학대하는 ‘인간적’ 자의식의 산물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의 인간성(정신성)을 내려놓고 우리 안의 동물성(육체성)이 이끄는 길로 가라는 것. 물론 그 동물성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폭력적 동물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극복해야 도달할 수 있는 부드러운 동물성(“soft animal”)이다. 그것은 절망에 빠진 인간이 그 절망을 함께 나누며 겨우 한걸음씩 나아갈 때, “그러는 동안”(meanwhile), 그와 무관하게 무심히 흘러가는 자연의 자연스러운 동물성이다. 인간이 아프게 인간적일 때, 자연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이 시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그러는 동안”의 뉘앙스가 그래서 아프다. 인간과 자연의 간극(‘인간이 그러는 동안 자연은…’)을 되풀이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6~12행을 읽으며 자연이 못 되는 인간의 고독을 생각하고 있을 때, 시인이 기러기의 목소리를 빌려 “격하고 뜨겁게”(harsh and exciting) 외친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제는 그런 생각에 빠져들지 말기를. “세상 만물이 이루는 가족” 속에 당신의 자리가 있으니, 무릎걸음으로 사막을 횡단하지 말고 기러기처럼 네가 있어야 할 곳을 향해 날아가기를. 아직도 잘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위로와 격려의 시에 대체로 냉담한 내가 왜 이 시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마는지.

세상 혹은 자기와 싸우다 패배하여 자책과 회한의 날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 이 세상에는 그럼에도 당신의 자리가 분명히 있다고 말하는 시다. 물론 당신에게는 이 시를 의심하고 거부할 권리가 있다. 메리 올리버가 “세상”이라고 부를 때 그곳은 내전의 현장이나 대도시의 빈민가가 아니다. 이 전원시인의 정치사회학적 순진성을 기소하는 이들의 손을 들어줄 판관들도 세상에는 있으리라. 그 일은 그들에게 맡겨두고 그 대신 나는 꼭 필요한 시점에 이 시를 읽게 되어 다시 이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어느 누군가를 상상해 본다. 인간의 한평생이 타인에게는 시 한 편만큼의 가치를 갖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할 때 나는 시 앞에서 오만해질 수가 없다.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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