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전태일이 기름을 부은 몸에 불을 댕기며 남긴 말이다.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구호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노동현장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제도권 안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 애써왔다. 그 결과 많은 사업장에서 노조가 결성되었고 최저임금법이 제정되었으며 노동자 국회의원도 탄생하였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46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우리 현실에서 근로기준법의 준수는 결코 ‘상식’이 아니다. 매년 2천명 이상의 노동자가 산재로 죽어 나가고 있다. 복지제도와 노동 관련 법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일반화했고, 최저임금 미준수와 장시간노동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분명 전태일은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의 현실은 그의 죽음을 조롱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전태일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초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내의 한 센터로 1996년에 출발하였고, 이듬해 재단법인으로 분리되었으나 최근까지도 전경련의 자금지원을 받았음이 밝혀져 화제가 되었던 단체. 바로 자유경제원이다. 이 단체는 올해 초부터 7월말 현재까지 12번에 걸쳐 ‘생각의 틀 깨기’라는 제목의 부정기 세미나를 진행 중인데, 이 중에서 무려 다섯 번이 ‘누가 전태일을 이용하는가’라는 주제에 할애되었다. 친재벌 단체가 전태일을 집중조명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혹시 이들도 몇몇 선진국의 경제단체들처럼, 불평등 심화에 따른 세계적인 최저임금 인상 기조와 경제민주화 움직임을 반영해 변화를 보이는 것은 아닐까? 세미나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하자 이런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많은 이들이 전태일을 접하는 주된 통로인 <전태일 평전>이 ‘자서전’이 아니라 ‘평전’이므로 전태일의 생애를 왜곡한 것이라는 주장부터 동의하기 어렵다. 전태일의 업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는 점잖은 전제는, 그가 죽음으로써 어렵게 닦아놓은 길을 오늘날의 ‘귀족노조’가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저 말장난에 다름 아님이 드러난다. 당시 경제성장 속도가 빨랐으므로 전태일은 노동운동만 안 했어도 잘살 수 있었으리라거나 자살은 의견표명을 위해 좋은 수단이 아니라는 ‘충고’는 사자명예훼손에 가깝다. 세미나의 한 발제자는 1960~70년대에 ‘근로기준법 등을 철저히 지켰다면 경제가 성장하기도 전에 위기를 맞이하지 않았을까?’라며 위법과 탈법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요컨대 전태일은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을 문제삼았고 따라서 그의 문제제기는 잘못된 것이며 결론적으로 그는 죽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흔히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현재’에 따라 ‘과거’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대한 연구란 오늘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명하는 데 그 본령이 있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해석 그 자체뿐 아니라 해석의 주체, 해석 대상의 선택, 해석의 시점 등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의 저작을 왜곡해 국내에 소개하는 데 일조한 인물이 원장으로 있는 단체가, 노동자들의 삶과 근로의 조건이 나아지기는커녕 뒷걸음질치고 있는 2016년 대한민국에서 전태일을 바로 읽자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g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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