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새누리당과 셰익스피어 / 김남일

등록 2016-07-26 17:32수정 2016-07-26 18:56

김남일
정치팀 기자

정치권에 햄릿 바람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지나갔다. 쪼개진 두 야당의 비상대책위원장들끼리 연극 <햄릿>을 관람한 데 이어, 당권에 도전하는 친박 이정현·비박 정병국 의원도 웬일인지 함께 <햄릿>을 봤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죽은 지 40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과 공연이 쏟아진 탓도 크지만,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하는 그 유명한 실존적 독백이 사생결단식 정치에 익숙한 여의도에 잘 먹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영국이나 덴마크 왕실을 배경으로 셰익스피어가 단골 주제로 삼았던 배신과 복수가 400년 뒤에도 정치적 비유나 헛소동에 머물지 않고 기어이 현실이 되고 마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그게 꼭 한국 정치만의 일은 아닐 것인데, 다만 누군가의 욕망을 부추기는 맥베스적 예언들이 4년이나 5년 주기로 정치적 무책임으로 나타나는 빈도는 어째 우리나라에서 유독 높은 것 같다. 국민들이 몽땅 짊어져야 할 그 저주의 운명이라니. 셰익스피어라면 한국을 배경으로 새로운 비극을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누리당 새 지도부를 뽑는 8·9 전당대회가 친박-비박 간 ‘사느냐 죽느냐’의 세 대결로 치닫는 양상이다. 셰익스피어식으로 번안하면 비박으로 살 것이냐 아니냐, ‘투 비박 오어 낫 투 비박’인 셈이다. 앞서 친박계는 최경환·서청원 의원이 ‘출마냐 불출마냐’의 기로에서 덴마크 왕자보다 더 깊은 고뇌를 보여줬다. 두 사람이 굳이 독백도 아닌, 다 들으라며 방백으로 처리한 불출마 선언은, 그러나 곧장 터져나온 최경환·윤상현·현기환 공천 개입 녹음파일 파문으로 죽은 선왕의 유령처럼 빛이 바랬다. ‘지역구를 옮기겠다는 약속을 잊었느냐’는 녹음파일 속 저주의 다그침, 이어진 협박과 모멸의 언어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한국으로 ‘브렉시트’하고 싶을 만큼 핍진한 것이었다. 전당대회 전 이 논란을 뜨거운 유황불에 튀기고 싶은 비박계와 폭풍우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친박계가 맞붙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모든 시련을 뒤로하고 전당대회가 친박의 승리로 끝나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좋은 것일까. 한국 정치에서 말하는 ‘끝’은 주로 대선이다. 국정을 아무리 분탕질해도 대선에서 이기기만 하면 새로운 5년이 보장된다. 새누리당도, 친박도 결국 대선에서 승리만 하면 4월 총선 참패쯤은 잊힐 것으로 보는 것 같다. 박 대통령도 ‘퇴임 이후’를 보장받기 위해 정권 재창출만큼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끝이 좋으면 다 좋아>라는 작품도 썼다. 결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잠자리도 바꿔치기하는, 지금 기준으로도 그리 권장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희극이면서도 ‘문제극’으로 분류되는 이유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라고 한다. 집권 첫해, 박 대통령이 예전에 쓴 수필을 두고 “실로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하다”는 다소 낯뜨거운 상찬이 한 문예지에 실렸다. ‘꽃구경을 가는 이유’라는 박 대통령의 수필이었는데, 여기에도 “끝이 좋으면 모든 게 다 좋다”는 말이 나온다. 박 대통령은 “다시 말해 끝이 만일 나쁘다면 그 전에 좋았던 것이 다 소용없다는 얘기도 된다”고 썼다. 박근혜 정부 3.5년을 돌아보면 그런 한가한 걱정을 할 때는 아닌 듯하다.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작품 <좋으실 대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연애할 때는 꼭 4월 같더니 결혼할 때는 12월 같아진다.” 봄바람 불던 4월 총선에서는 그나마 유권자들이 새누리당과 ‘밀당’을 했을지 모른다. 찬바람 부는 내년 12월 대선에서는 파혼당할지 모를 일이다.

namfic@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