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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호텔

등록 2016-08-03 18:06수정 2016-08-03 19:27

전우용
역사학자

“TOUR는 관광을, TRAVEL은 진정한 여행을 뜻한다.” 어느 여행사의 광고 카피다. 맞는 정의인데, 이 여행사는 현명하게도 TRAVEL의 어원이 고생, 고역이라는 뜻의 TRAVAIL이라는 설명은 생략했다. 이 설명까지 추가하면, ‘진정한 여행상품을 판매한다’는 말은 ‘사서 고생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된다.

여행(旅行)의 여(旅)는 본디 500명의 병사라는 뜻이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무리를 이루지 않은 채 홀몸으로, 또는 소수 인원으로 산 설고 물 설고 낯설고 말 선 남의 땅에 들어가 돌아다니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남의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나라 안에서도 타지(他地) 사람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그걸로 먹고사는 상인이나 국가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은 관리가 아니면 일부러 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안전문제는 그럭저럭 해결한다 해도 고생까지 면할 수는 없었다. 고생하는 여행자에게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호텔의 어원은 라틴어 HOSPITALE로 병원(hospital)의 어원과 같다. 여행자와 환자는 본래 같은 부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호텔은 1888년 일본인이 인천에 세운 대불호텔이지만, 그 뒤에도 <독립신문>은 객줏집을 HOTEL로 번역했다. 일본인들은 자국민을 위한 숙박업소에는 여관(旅館)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한국인들이 이런 이름의 숙박업소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말부터였다. 이후 한국의 숙박업소들은 호텔, 여관, 여인숙 등으로 서열화했던바, 호텔은 행정적 규정과는 별도로 중류층 살림집 이상의 시설을 갖추고 고급 음식을 제공하는 업소로 자리잡았다.

호텔 덕에, 무거운 진실이었던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입에 발린 소리’로 바뀌었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행 중에 자기 집 방보다 더 좋은 방에서 자고, 자기 집 음식보다 더 좋은 음식을 먹는다. 호텔은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고행에서 향락으로 바꿔 놓은 주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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