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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세탁기

등록 2016-08-10 18:05수정 2016-08-10 19:27

전우용
역사학자

조선시대 관리들에게 주는 녹봉을 ‘신수비’(薪水費)라고 했다. 땔감과 물을 구하는 데에 필요한 돈이라는 뜻이다. 왜 녹봉에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밥값이나 쌀값이라고 하기에는 미안한 수준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일반 가정에서는 ‘신수’가 성별 역할분담을 표시하는 개념이기도 했다. 땔나무를 구해 와서 적당한 크기로 자른 뒤 쌓아 놓는 것은 남성의 일이었다. 반면 여성에게는 물과 관련된 모든 일이 배정되었다. 밥짓기, 설거지하기, 빨래하기, 걸레질하기 등등. 가사노동에서 이런 성별 역할분담은 동서가 다르지 않았으나, 동양에서는 특히 남성=양(陽)=불, 여성=음(陰)=물이라는 음양사상이 이를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되었던 듯하다.

물과 관련된 일 중 가장 힘든 게 빨래였다. 빨랫감을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까운 개울가나 강가, 우물가의 ‘빨래터’로 가서는 물에 담갔다가 뺐다 하며 비비고 주무르고 두들기고 쥐어짜는 일을 반복해야 했으니, 겨울철에는 일이라기보다는 고문에 가까웠다. 여성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빨래터에서 형성되는 여성들만의 커뮤니티였다. 대다수 여성에게 빨래터는 가정보다 더 넓은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다.

1874년 미국의 윌리엄 블랙스톤이 아내에게 생일선물로 주기 위해 가정용 수동세탁기를 발명했다. 그가 빨래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를 안타깝게 여긴 건 분명하지만, 자기가 빨래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전기모터가 달린 가정용 세탁기가 발명된 건 1908년이다. 우리나라에는 해방 직후부터 미제 세탁기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1969년에는 금성사가 일본 히타치사와 기술제휴로 생산한 세탁기를 출시했다.

세탁기는 가사노동의 시간 배분 비율을 혁명적으로 바꾸었고, ‘빨래는 여성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에도 큰 타격을 가했다. 여성의 가사노동 부담을 줄여준 물건들에 순위를 매기는 대회가 열린다면, 세탁기가 시상대 위에 설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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