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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궁중요리

등록 2016-08-17 17:57수정 2016-08-17 19:43

전우용
역사학자

중국 청말의 실권자 서태후는 권력을 지키려 자기 자식마저 해친 잔인한 성품으로 인해 중국 역사상 3대 악녀의 1인으로 꼽힐 뿐 아니라,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치로도 유명하다. 청일전쟁 중에 군비를 빼돌려 자기 처소 이화원을 조성했고, 3천 상자의 옷을 장만해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었으며, 매끼에 120여 가지의 요리를 먹었다. 그의 한 끼 식비는 보통 사람의 1년치 식비에 해당했다. 청조가 망한 뒤 그의 식탁에 올랐던 음식 레시피에는 ‘황실요리’ 또는 ‘궁중요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궁중요리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1967년 3월 독일의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한-독 양국 대통령 부부를 위한 오찬 상차림은 ‘조선시대 궁중요리’였는데, 신선로, 전어, 전복조림, 도미튀김, 물김치, 나물, 불고기, 구절판, 보김치, 대하찜, 다시마튀각, 족편, 만둣국, 떡화채의 14종이었다. 요즘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고 특별히 비싼 축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일본에는 궁중요리를 파는 음식점이 없다. 왕이 실존하는데 신민(臣民)이 궁중요리를 먹는 것은 불충(不忠)이고 비례(非禮)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궁중요리가 저자로 흘러나온 건 1907년부터다. 이해에 고종을 황위에서 쫓아낸 일제는 곧바로 ‘궁내부 역원 정리’를 단행해 내관, 상궁, 나인들을 대량 해고했다. 그 직후 요릿집 명월관은 궁중요리에 능숙한 요리사를 새로 채용했다고 광고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덕수궁 이태왕전하’와 ‘창덕궁 이왕전하’가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궁중요리’ 간판을 내걸 수는 없었다. 간판이나 유리창에 거리낌없이 ‘궁중요리’라는 글자를 쓸 수 있게 된 건 궁중이 사라진 뒤였다.

궁중요리를 먹는 것은 궁중이 유적으로 변한 공화국 국민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지만 이 특권도 캐비아, 송로버섯 등 최고급 서양 귀족 요리를 먹는 현대의 새 특권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처럼 초라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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