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발기인 참으로 놀라운 일은 그렇게 헬조선이 있음에도 또한 없다는 것이다. 사회 현실 속에 분명 있지만 이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이 그것을 느끼지 않거나 느낄 줄 모르는 비대칭성, 어쩌면 이것이 가장 무서운 헬조선다운 헬조선의 면모일지 모른다. 요리문화 발달의 조건으로 ‘지체 높은 분의 입’과 ‘풍부한 식재료’의 두 가지를 드는데, 동양의 중국과 서양의 프랑스에서 요리문화가 발달한 것을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절대권력자인 황제 치하의 중국이 광활한 땅에서 식재료가 풍부했듯이, 프랑스 또한 중앙집권의 절대군주제가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일찍 자리잡은데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안에 둔 넓은 땅에서 나온 식재료가 풍부하여 요리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국내로 좁혀서 전주 지방의 요리문화 발달도 이 두 가지 조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오랜 동안 언론매체에서 만난 ‘기후변화’라는 말이 디스토피아 미래상이 아니라 눈앞 현실로 다가온 듯 폭염이 지속되는 때에 뜬금없이 요리문화 얘기를 꺼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구중궁궐 청와대에서 송로버섯 얘기가 흘러나온 탓이다. 프랑스의 페리고르 지방에서 많이 나오고 ‘검은 다이아몬드’라고도 불리는 송로버섯은 거위 간, 철갑상어알(캐비아)과 함께 최고급 요리 재료로 알려져 있는데, 최음 효과가 있어서인지 나폴레옹 1세와 마리루이즈 황후의 식탁에 자주 올랐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니 21세기 자유무역 시대에 나라의 가장 높은 분께서 가장 총애하는 신료와 함께 그걸 즐겼다는데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설령 ‘전기료 폭탄’을 맞을까봐 에어컨을 틀지 못한 채 어디서 이 지옥 같은 찜통더위를 피할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을지라도 그 정도의 일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으로선 온당치 않은 일일 수 있다. 다만 2014년 4월16일이 뇌리에 각인된 탓인지, 고급 식재료에 대한 미감 능력은 있어도 세월호 참사를 당한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과 괴로움에 대한 공감 능력은 없는지 묻게 하면서, 떡갈나무나 개암나무 숲의 지표면 아래 5~10센티미터에서 자란다는 그 송로버섯을 캐는 데 하필이면 개나 돼지의 후각을 이용한다는 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속내 한구석을 계속 할퀴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왜 하필 개와 돼지인가? 교육부 고위 관료의 말처럼 배만 채우면 되는 개돼지는 보물을 찾아도 다만 냄새나 맡을 뿐이고 주인에게 바치라는 뜻이 다가와서일까? 실상 동양이든 서양이든 민중은 그저 개와 돼지처럼 배만 채우면 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17세기는 간빙기 속 이상저온 기후 때문에 동서양에서 공히 흉년이 잦았던 세기였다. 그때 일반 민중의 삶의 비참함은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두 글자의 이름을 갖곤 했다. 루이 14세가 절대군주로 군림하던 프랑스의 17세기도 그랬던지 1680년께 앙주 지방에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평소에는 먹지 않던 고사리의 뿌리와 순으로 빵을 만들어 허기를 채워야 했던 때의 얘기 한토막이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의 참상을 보다 못한 그랑데라는 이름의 마을 신부가 베르사유궁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태양왕 루이 14세를 알현한 신부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이걸 먹고 있습니다”라면서 고사리빵을 왕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왕은 꾸역꾸역 먹어치우고는 이렇게 말했더란다. “짐이 맛있게 먹었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라.” 어안이 벙벙해진 신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맛있게 먹었다는데…. 타박타박 힘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마을에 도착해보니 왕이 보낸 구호곡물이 먼저 도착해 있더라는 얘기…. 어떤 이는 고사리빵을 맛있다는 듯 먹은 뒤 구호물을 보낸 루이 14세에게서 발터 베냐민이 말한 아우라를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일반 민중이 개와 돼지처럼 배만 채우면 되던 시절, 높으신 분들의 심성 안에는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비참함에 대해 서양에는 기독교 전통 아래 ‘긍휼’이라는 게 있었고 동양에는 공맹사상 아래 ‘측은지심’이라는 게 있었다. 지체 높은 분들 스스로는 추위와 배고픔을 겪지 않았어도 공감 능력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추위와 배고픔이 많이 사라진 만큼 세상은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 그와 함께 긍휼과 측은지심도 엷어졌다. 물론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을 쓴 빅토르 위고의 “온정, 시혜에 관해 사람들은 받는 쪽이 아닌 주는 쪽에서만 생각한다”는 말이나, <주홍글씨>의 너새니얼 호손의 “온정과 오만은 쌍둥이다”라는 말이 시사하듯, 온정과 시혜를 필요로 하는 사회보다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는 것은 분명하다. 남의 온정과 시혜가 필요한 상황, 그것 자체가 이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은 사적 온정과 시혜의 영역에서 공적 분배, 공적 권리의 영역으로 확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노동3권 등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의 권리를 신장해왔다. 이를테면, 비참하거나 고단한 민중의 삶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엷어진 그만큼 공적 분배와 권리가 확장되어야 했고 노동자의 권리 또한 신장되어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감 능력은 사라졌는데 공적 분배와 권리 부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최저 수준인 채로 노동자들의 헌법적 권리가 지켜지는 대신 하위 법률에 의해 왜곡, 변질, 배반되어 관철된다면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헬조선’의 그것에서 멀지 않은 게 아닐까. 오늘 노동자들에 대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임금 체불과 저임금, 손배 가압류와 블랙리스트는 과거의 추위와 배고픔인데, 또 달라진 건 높은 사람들을 비롯하여 사회 구성원의 공감 능력이 사라지거나 엷어졌다는 점이다. 최근 울산과학대의 청소노동자 9명은 한 명당 8200만원의 압류 처분을 받았다.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인상해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학교 밖으로 내쫓은 울산과학대 당국자와 2014년 6월부터 장기 농성투쟁을 벌이고 있는 그들에게 1인당 8200만원의 압류 처분을 내린 사법부는 그 숫자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셈해보기나 했을까? 헬조선은 그 숫자에 있고, 2015년에 하루 평균 5명이 산재로 사망하고 하루 평균 38명이 자살하는 통계 숫자에 여실히 있다. 유성기업과 갑을오토텍에 있으며, 오늘로 318일째를 맞는 ‘삼성직업병 문제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반올림 농성’이 있는 서울 강남역 8번 출구에 있으며, “팀원 중 한 명이 상을 당해 팀원 전체가 하루 일을 쉬고 조문을 하고 왔더니 업체에서 이제 나오지 말라고 하더군요”라는 다단계 하청구조의 밑바닥인 조선소 물량팀에게 있다. 또 장래를 설계할 수 없는 흙수저 출신 청년들의 어깨 위에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그렇게 헬조선이 있음에도 또한 없다는 것이다. 사회 현실 속에 분명 있지만 이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이 그것을 느끼지 않거나 느낄 줄 모르는 비대칭성, 어쩌면 이것이 가장 무서운 헬조선다운 헬조선의 면모일지 모른다. 폭염이 지속되는 거리에 나서니 모두 내부 열기를 바깥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차로를 메운 자동차들이 내부 열기를 바깥으로 내보내고 있었고 아파트와 사무실도 내부 열기를 에어컨 실외기를 통해 바깥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사적 공간의 쾌적함이 태양의 열기로 가득한 공적 공간을 더욱 찜통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내가 에어컨을 최대한 삼가기로 한 것은 전기료 폭탄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연재홍세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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