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1996년 6월15일, 서울시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왕궁 수문장 교대식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군복을 입고 장창과 언월도를 든 장졸(將卒)들이 덕수궁을 파수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나는 그 북소리와 그 동작조차 ‘재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퍼포먼스는 지금 경복궁 앞에서도 거행되며 한동안은 숭례문 앞에서도 치러졌다. 1881년, 조선 정부는 서양식 조련법을 택한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기에 앞서, 악공(樂工) 몇 사람을 일본에 보내 서양 나팔 부는 법을 익히게 했다. 간단한 연주법을 익히고 귀국한 이들은 별기군 부속의 곡호대(曲號隊)로 편성되어 제식훈련을 비롯한 각종 훈련 때에 나팔을 불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서양 악기로 사람의 신체를 조율한 첫 사례였다. 별기군 이전의 구식 군대에서 군인들에게 ‘발맞추어 가’를 가르쳤다는 기록은 없다.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다리가 긴 사람과 짧은 사람에게 같은 보폭을 요구하는 것은 부자연스런 일이다. 보행 속도를 맞추는 자연스런 방법은, 다리가 짧은 사람은 발을 재게 놀리고 긴 사람은 천천히 놀리는 것이다. 곡호대의 나팔은 다리 길이에 상관없이 같은 보폭, 같은 속도의 보행을 주문했다는 점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비슷한 구실을 했다. 같은 보폭, 같은 속도로 행군하는 법을 창안한 사람은 18세기 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신식 군대의 제식 훈련이 학교 체육에 편입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는데, 학교에서 나팔 대신 사용한 것이 호루라기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게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같은 보폭으로 걷는 법이다. 물론 이 초보적인 악기는 승패를 가르는 각종 경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기로도 쓰인다. 현대의 호루라기는, 획일화와 경쟁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사회적 요구를 체현한 특별한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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