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대통령이 저격당했다. 대통령이 의식불명인 가운데 이라크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된다. 국가안보고문은 데프콘4의 발령을 제안한다. 국방장관은 침묵한다. 부통령은 망설인다.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스승인 비서실장의 눈치를 본다. 권력 실세인 비서실장은 제안을 일축한다.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에서 평범하게 스쳐 지나간 한 장면이다. 대통령이 저격당했는데, 국무회의 발언권 따위가 뭐 중요하냐고 시청자들은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역사상 최고의 티브이 시리즈로 빈번하게 거론되는 이 비범한 드라마는 찰나의 장면이 불러일으킨 파장을 몇 년 동안 쫓았고, 4년 연속으로 에미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미국 연방 수정헌법 제25조는 대통령의 공석 혹은 권한과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통수권이 부통령에게 귀속한다고 규정한다. 미연방 국가안전보장법 제202조는 국가안보에 있어 국방장관이 통수권자에 대한 주요 보좌권한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대통령 비서실장의 권한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의사결정의 절차적 하자가 있었던 것이다. 단 한순간. 그리고 아주 사소해 보이는 하자. 그러나 언론은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부재한 이날 밤의 통수권을 누가 행사했는지 쫓기 시작하고, 국무위원들은 대통령이 권한 위임장을 작성하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하고, 백악관 보좌진은 그날 밤의 의사결정을 ‘대통령의 친구’가 내렸을 거라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재선을 목전에 둔 어느 날, 백악관 공보수석은 마침내 마음속에 담아둔 독설을 대통령에게 쏟아붓는다. “제 말은 우리가 혼란과 공포에 사로잡혔던 밤, 우리가 전쟁과 테러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던 그 밤 동안, 누가 국가안보에 관한 명령을 내렸는지가 불확실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권한 위임장을 작성한 적이 없으니까요. 저는 그 위임장이 서류함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유를 압니다. 누군가 그 위임장을 발견하게 되면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까 봐 그랬겠지요. 국무위원과 장관들은 국민들이 직접 손으로 선출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 명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돌처럼 굳어버린 대통령을 향해 공보수석은 단호하게 덧붙인다. “그날 밤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 그것은 쿠데타였습니다!”(there was a coup d’Etat!)” 이 대목에서 드라마는 대통령이 저격당한 충격적인 순간을 ‘사고’로, 대통령의 통수권이 위임 절차 없이 친구에게 양도된 평범한 순간을 ‘쿠데타’로 재구성하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제이티비시>(JTBC) 보도에 따르면 최순실이 수정한 대통령의 연설문은 청와대 담당 직원들에게조차 연설 몇 분 전에 전달되었다. 최순실이 연설뿐만 아니라 국정 기조를 결정하는 대통령의 국무회의 모두발언문까지 작성했다는 사실은 훨씬 심각한 문제다. 지난 11일에 열린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대통령은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처럼 독자적인 대북제재를 강력하게 추진해 달라고 관계 부처에 주문하면서, 사실상 북한 선제타격론을 표명했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 한 나라가 전쟁의 기로에 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말이었을까? 국가통수권은 오직 국민이 뽑은 선출권력에게만 부여된다. 이를 비선출권력이 행사해 왔다면, 더 이상 ‘측근의 월권’이나 ‘권력 실세의 국정 개입’이라 부를 수 없다. 우리가 혼란과 공포에 사로잡혔던 밤들, 우리가 전쟁과 테러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던 그 밤들 동안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 그것은 쿠데타였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