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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파쇼의 말뭉치와 책임을 물을 권리 / 권명아

등록 2016-10-27 18:19수정 2016-10-27 20:28

권명아
동아대 국문과 교수

최순실 파일로 정국이 들끓는다. 증오선동에 앞장섰던 보수 매체들이 ‘부끄러워’하며 ‘최순실 세신사’까지 추적하는 게 언론과 ‘정의’의 승리로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문장’으로 무수한 사람을 ‘종북’, ‘전문 시위꾼’, ‘세금도둑’으로 사냥해온 집단이 문장의 출처를 추궁하며 문장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그간 보수 언론과 관련 집단이 출처와 상관없이 다양한 문장을 무기로 해온 일은 괴벨스의 ‘문장론’에 꼭 들어맞는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외친 히틀러의 대중선전 담당관 괴벨스에게 문장은 증오정치의 가장 중요한 무기였다.

사태는 복잡하지만, 연설문으로 상징되는 대통령의 문장에 ‘외부세력’이 개입되었을 수 있다는 ‘합리적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 문장들은 중요한 정책 기조를 선전하거나 아주 자주 정부가 책임져야 할 사안을 무마하고 ‘희생양’을 만들어 전가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문장’을 실어 나르며 증오선동에 나섰던 보수 매체는 배후와 원천을 물고 늘어지며 폭로의 스펙터클로 문장과의 연루와 ‘묶임’의 역사를 지운다. 신정국가, ‘무당’ ‘화류계’와 같은 표현을 동원한 담론 구조는 야만과 주술로 가득 찬 전근대의 비사로 관객을 매혹한다. 한편 히틀러를 다룬 영화로 ‘최순실 게이트’를 패러디한 동영상이 화제다. 그러나 이 패러디는 파시즘의 역사를 통해 이 사태에 대해 고민해야 할 질문을 누락시키고 미숙한 어린아이의 꼭두각시놀음을 조롱하는 쾌락으로 관객을 이끈다.

기묘한 원한으로 뭉친 파시즘 동지들은 ‘혁신’이라는 단어를 사랑했고 혁신은 증오와 절멸의 방법론이었다. 파시즘의 과도한 난폭함과 기이한 지배 및 복종의 구조는 원한으로 맺어진 형제애와 정치 종교적인 결속에서 비롯되었다. 괴벨스가 만든 문장은 동료 나치들을 묶는 결속의 무기였고, 이렇게 묶인 파쇼들은 ‘적’에 대한 증오선동을 통해 문장을 완성했다. 그 유명한 ‘최종해결’이란 문장은 증오로 묶인 파쇼가 자행한 집단학살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파시즘 정치의 핵심은 문장이 파쇼(묶음)를 만들고 묶음이 증오를, 증오가 학살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증오를 확대재생산하는 말뭉치는 이뿐만이 아니다. ‘세월호 특조위 활동 연장은 세금이 많이 드는 문제’라는 문장은 진상규명에 대한 세월호 유족의 요구를 ‘세금도둑’의 염치없는 짓으로 만드는 식으로 받아 쓰였다. 이런 문장을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반복하고 외쳐댄 보수 매체는 세월호 유족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확성기 역할을 충실히 했다. 또 ‘지금 같은 교과서로 배우면 북한에 의해 통일될 수밖에 없다’는 문장은 교과서 국정화의 정책 기조를 정당화하는 보수 매체와 집단에 의해 반복 인용되고 확산하여 종북몰이 증오선동의 무기가 되었다. 이 문장과 묶음의 확산이 12·28 한일 외상의 위안부 합의를 ‘최종해결’이라는 문장으로 담아낸 것은 끔찍할 정도로 ‘역사적’이다.

이렇게 문장이 묶음을 만들어 증오선동을 확산하고 국가의 책임을 희생양에 전가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문장의 원본과 출처, 대리 작성자에 대한 폭로전의 스펙터클이 변화무쌍하다. 문장을 받아쓰고 확산시켜 파쇼의 말뭉치를 만들고 증오선동에 앞장선 책임은 너무나 엄중하다. 과연 사냥은 끝났나? 사냥에 대한 책임, 사냥의 무기인 ‘문장’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할 집단이 책임을 추궁하는 상황을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적 장면이라 할 수는 없다. 책임을 추궁할 권리는 그들에게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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