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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광장의 자유 / 서복경

등록 2016-11-02 18:07수정 2016-11-02 19:02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사태는 심각하다. 얼마나 심각한가를 묘사하는 언어들을 모두 군더더기로 만들어버릴 만큼. 그런데 이 뜬금없는 해방감은 뭔가 싶어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수만의 시민들이 거리를 점령한 다음날, 경찰이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보도자료를 냈단다.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지난 몇 년, 경찰이 ‘엄단, 엄벌, 엄중 책임, 전원 사법처리…’가 빠진 보도자료를 낸 적이 있었나? 부족한 인력으로 불철주야 고생하고 있는 일선 경찰관들을 비아냥거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우리나라 경찰조직이 이런 시민 친화적 언어를 구사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몇몇 지상파 방송 예능프로그램에서 현 사태를 풍자하는 발언과 자막이 있었단다. 그 사실이 뉴스로 보도되는 걸 보면서, 오래전 채널만 돌리면 곳곳에 그런 프로그램들이 있어 뉴스조차 되지 못하던 세월이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시나브로 그런 진행자와 출연자들이 지상파에서 사라져갔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다. 언제부턴가는 어떤 연예인이 ‘시사적인 발언’을 했다는 기사를 접하면, ‘무사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그뿐이었다.

매일 포털로 뉴스를 접하면서, 뉴스 밑에 달린 댓글들의 희한한 국어 사용법이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혣실이, 그네, 태미니…’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왜 그렇게밖에 쓸 수 없었던가를. 누군가가 인터넷에,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글 썼다가 털리고 기소되고 재판받는다는 소식이 줄을 잇는 세월에는 그렇게라도 자기보호를 해야 했으리라. 그런데 최근 ‘탄핵, 하야, 퇴진…’이라는 언어들이 굴절 없이 표현되고 있었다. 그제야 지난 몇 년 내가 익숙해졌던 희한한 국어 사용법이 이런 세월을 견뎌냈던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지난 토요일, 황망하고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연이어 접하면서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하러 나온 시민들이 거리를 덮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거리에는 재미난 볼거리가 많았다. 개인들이 혹은 모임에서 자체 제작한 여러 종류의 손팻말, 가면, 몸자보, 기발한 슬로건을 담은 현수막들이 흘러 넘쳤다. 누군가는 인터넷에 ‘차에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붙이고 다니자’는 제안을 올렸다. 자유! 그제야 그 익숙한 단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오래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살았던 그것들은 본시 내 것이었다. 경찰은 시위를 막는 게 아니라 시민을 보호하는 게 임무였고, 누구든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되었으며, 누군가의 시선이 두려워 스스로 자기검열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만약 작금의 사태를 시민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제일 먼저 시민들의 입과 귀를 막을 것이다. 어떤 유명인이 탄압받을 수도 있고, 어떤 무명인이 자유롭게 게시한 글로 기소될지도 모른다. 혹은 집회 참여자들이 불법집회 가담자가 될 수도 있겠다. 그때 ‘나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진 않지만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고 했다던 어떤 이의 말을 우리 모두가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사태가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시민적 연대가 유지될 수 있다면, 우리는 좀더 많은 정보를 공유할 것이고 좀더 다양한 해석을 접할 것이며 좀더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개인으로 시민은 약하지만 연대한 시민은 강하다. 시민들의 연대는 내가 아닌 다른 시민들의 말할 자유, 들을 자유를 지켜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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