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광화문에 다시 시민들의 목소리가 넘쳐난다.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변화들은 대부분 제도권 밖에서 시민들의 집합적인 행동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들의 목소리가 최종적으로 모인 곳은 광화문이었다. 광화문은 그 탄생부터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공간이다. 조선시대 경복궁의 남쪽에 세워진 정문으로서 관청이 늘어선 육조대로를 앞에 두었던 광화문은 그 상징적 위상 때문에 항상 역사적 대결의 공간으로 호명되었다. 광화문에서 벌어진 집회가 아무리 평화적이어도 그 이면에는 늘 역사의 흐름을 가를 치열한 전투와 시대적 긴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광화문에서 벌어진 최초의 근대적인 직접민주주의 경험은 1898년 만민공동회일 것이다. 오늘날 촛불집회의 기원이 될 만민공동회는 당시 서울시민이 13만여명일 때 1만여명의 시민이 광화문에서 동쪽으로 열린 종로에 모여 길게는 42일 동안 장작을 피우며 밤샘 집회를 벌였다. 3월의 1차 만민공동회는 부산 절영도 저탄소 조차 반대 등의 주장을 통해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 침탈을 물리쳤고, 10월의 2차 만민공동회는 7인의 대신을 파면하고 박정양을 수반으로 하는 개혁파 정부를 출범시켰다. 3차는 11월부터 12월25일까지 42일 동안 철야 집회를 통해 헌의6조를 인정받고 광무계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뒀다. 지금의 헌정질서를 탄생시킨 1987년의 6월 항쟁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앞장서고 넥타이 부대로 불린 중산층이 광화문에 합류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다. 불완전한 타협으로 평가되는 이 과정은 흔히 사회화, 정치화, 제도화의 3단계의 모델로 설명된다. 첫번째 사회운동의 단계는 시민들이 주도했지만, 정치화 단계에서는 기존 여야 정치인들이 협상을 전담했고, 마지막 제도화 단계에서는 애초에 국면을 주도했던 시민이 배제된 상태에서 소수의 지도자나 법률전문가들의 무대로 바뀌었다. 지금도 시민들은 이러한 상황을 우려한다. 그러나 제도화 단계의 방향 역시 근본적으로는 시민들의 지속적인 참여 여부에 의해 규정받을 것이다. 87년 체제 출범 이후 30년 동안 우리 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공고화되었다. 바꿔 말하자면, 강화되는 법의 지배라는 원칙 앞에서 법의 적실성을 회복하고 법의 한계를 깨뜨리려는 사회운동의 역할도 법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민들은 새로운 사회계약을 원하지만 지금 상황이 자연상태에서 주권을 위임하는 홉스적인 원계약 상황은 아니고 민주화로 성취한 기존 질서 위에 계약 내용을 수정하는 신계약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탄핵에 의한 대통령 퇴진이나, 유고에 의한 대통령 권한대행 선출, 개헌을 통한 대통령 임기의 단축 등 현재의 정당한 헌법 질서 안에서 가능한 모든 절차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2016년의 역사적 상황이 어떤 경로를 밟아 어디로 향해 갈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각 진영마다 누군가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겠지만 모든 계획은 사건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역사의 우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프레임을 말하고 로드맵을 말하지만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모든 이론은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 그 의미에 대해 말할 것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행동이 갖는 혁명적 창의성을 파괴”한다. 결국 어떤 이론으로도 포괄할 수 없는 시민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역사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 가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며 역사는 우리의 행동 없이 정의가 저절로 구현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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