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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확률적인 최선 / 손아람

등록 2016-11-23 18:27수정 2016-11-23 21:03

손아람
작가

19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의 흑인 후보 톰 브래들리는 공화당의 백인 후보한테 15%포인트 이상 앞섰다. 출구조사에서도 당선이 확실시되었지만 개표 결과 낙선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사이 미국의 주 단위 선거에 출마한 흑인 후보는 여론조사보다 평균 2.7%포인트 낮게 득표했다. 이를 ‘브래들리 효과’라고 부른다. 브래들리 효과를 의식한 오바마 캠프는 여론조사에 인종적 편견을 직접 묻는 문항을 포함시키는 대신 “당신의 이웃이 흑인 대통령을 뽑으려 할까요?”라는 유도신문에 가까운 문항을 삽입했다. 그리고 이 문항에 “아니다”라고 대답한 백인 유권자에게 보내는 선거홍보물에는 공식 슬로건인 “변화”(CHANGE)를 빼고 경제 공약만을 적기로 결정했다.

여론조사에서 한때 15%포인트 가까이 뒤졌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사건이 브래들리 효과인지 역(逆)브래들리 효과인지를 두고 미국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브래들리 효과라면 남성 유권자들이 여성에 대한 편견을 남몰래 드러낸 것이고, 역브래들리 효과라면 민주당 성향인 여성과 소수인종 유권자들이 소리없이 이탈한 결과다. 패배 연설에서 “높고 딱딱한 유리천장”을 언급한 힐러리 클린턴은 스스로 브래들리 효과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여성과 소수인종 유권자들이 클린턴에게 표를 주지 않은 게 패인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여론조사뿐만 아니라 투표율 조사도 실제의 투표율보다 10%포인트 이상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다. 비밀투표 제도가 도입된 뒤로, 정치인뿐만 아니라 유권자도 지킬 의사가 없는 공약을 행사하게 된 셈이다. 예일대학교에서 이뤄진 실험 결과에 의하면 “이번 선거부터 투표 이력이 공개된다”는 편지를 보낸 것만으로 해당 선거구의 투표율은 8%포인트나 올랐다고 한다. 행동심리학자 토드 로저스는 투표를 정치적 의사결정 행위가 아닌 사회적 자기표현 행위로 간주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대도시 유권자들이 더 진보적인 원인을 정치학이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게 사회학의 과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도시 유권자는 공공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포즈를 취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압력을 비교적 크게 받는다.

숫자는 그 사회의 집단 무의식을 검출해 낸다. 일본에서는 실제로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인터넷에는 극성스러운 극우주의자에 ‘넷우익’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국에서도 흔히 반인륜적 언행을 일삼는 은둔 집단으로 알려진 ‘일베’가 접속자 기준 국내 20위권에 드는 초대형 웹사이트다. 한국에서 정치적 무능력자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듯이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 트럼프가 보이지 않는 표를 쓸어담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프랑스에서는 히틀러의 부활이라 평가받는 장마리 르펜의 딸 마린 르펜이 한때 대통령 지지율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회의론이 전 세계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함정에 빠지는 건 유권자이지 유권자 제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확률적인 최선이다. 시민들은 정치적 목표를 귀납적으로 보정할 수 있다. 광장에 모인 백만 시민들의 장관을 보라. 상당수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투표했을 것이다. 대안적인 공화제였다면 애초에 다른 지도자를 갖게 되었을 거라는 상상은 필요 없다. 그게 더 나았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트럼프를 58회의 대통령 선거 만에 미국사에 등장시키고, 외아들인 박지만씨가 약물치료감호시설을 거치지 않고 청와대로 직행할 수도 있었던 상속 순번을 저지시킨 게 바로 이 제도의 힘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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