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생일 선물로 책 <죽음에 대하여>(장켈레비치)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출생일에 죽음에 대한 책을 읽는다. 내게 죽음은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친구와 같다. 나는 16살 때 처음 자살시도를 했다. 학교 속 쳇바퀴 같은 세상, 완벽한 무언가가 되기를 요구하는 세계에 적응할 힘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손목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면서 곧 도착할 ‘죽음’이라는 까마득한 무의미에 아찔해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구나. 내 육체는 소멸하고, 세상에서 없어지는구나. 이렇게 없어질 껍데기 몸이라면 조금만 더 살아볼까. 차라리 나처럼 혼자 울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뭐라도 하다가 죽을까.’ 그렇게 죽음을 유보한 채 1년, 2년이 지났다. 11년이 지난 오늘까지 나는 수명을 연장한 채 살아 있다. 생일날 인문학 카페에서 ‘우울한 열정’이라는 테마로 생일파티 겸 축제를 했다. 한 친구는 “고통스런 인생을 살게 된 것이 마냥 축하할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축하한다”고 말했다. 여느 떠들썩한 파티와 다르게 침묵의 공백이 사람들 사이를 채웠다. 각자 쓴 시와 글을 낭독하고, 들려주고 싶은 음악을 연주했다. 음울한 음악은 온기를 더해줬고, 각자의 흑역사를 얘기하는 시간에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주역타로를 보면서는 구체적인 삶의 고민을 공유했다. 우리는 울다가 웃고,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수많은 죽음이 스쳐갔다. 2년 전 대낮에 배에 탄 수백명의 사람이 죽어갔고, 하루에도 몇십명씩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3일에 한명씩 무수한 여성이 가정에서, 거리에서 살해된다. 애도는 조급하게 마무리된다. 개발, 미래, 성공의 종교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죽음’은 무겁고 철 지난 철학적 문제로 취급된다. 전체주의 사회는 ‘무겁지’ 않다. 나치는 ‘매혹적인 파시즘’으로 뜨거운 축제와 오락을 유포했다. 정치는 스포츠화된다. 정치인은 선수가 되고, 그걸 보는 우리는 관람객이 된다. 상품이 된 서로를 소비할 뿐, ‘삶의 자리’는 없다. ‘전체주의는 오락으로 사회를 지배한다’고 했다. 너도나도 ‘재밌게, 가볍게’를 외치지만, 유머는 없다. 유머는 건조한 오락이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모순임을 알고, 이 모순을 비웃고, 울다가, 다시 웃게 되는 것이 유머다. 혐오를 품은 구호와 풍자가 유머일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 하야 열기로 뜨거운 지금, 우리는 어떤가. 단일한 구호와 함성 속에서, ‘나쁜 년’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고, 우리 안의 폭력성을 성찰하자는 목소리는 대의를 거스르고 분위기를 깨는 것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 애도는 지루한 주제가 되고, 죽음에 대한 질문은 무겁고 따분한 것이 된다. 각성을 요구하는 비판을 하면 ‘진지충’이라는 조롱이 붙는다. 전체주의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 건 뭘까. 무소의 뿔처럼 자기 실존에 토대를 둔 개개인이 아닐까. 이 개개인은 탈사회화된 개인주의와 다르다. 절망할수록 소멸되는 게 아니라 선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사유할수록 삶은 선명해진다. 죽음의 철학자 장켈레비치는 말한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언정 나 자신에게는 의미가 없다.’ ‘사후에 남는 것이 있다면 살았다는 것, 존재했다는 것, 사랑했다는 것뿐이다.’ 정말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일까. 구체적인 나의 오늘이다. 거대개념이 오늘을 삼키지 못하도록, 다시 나는 죽음을 옆구리에 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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