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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히로뽕 시대’와 결별하기 / 황상철

등록 2016-11-29 18:18수정 2016-11-29 19:06

황상철
국제뉴스팀장

올해는 참 수상한 해다. 합리적 예측이나 상상력을 무색하게 하는 사건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벌어지는 일은 드물다. 지난 6월 영국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결정이 나오더니, 급기야 지난 8일 미국 대선에선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돼버렸다. 하나하나 경악할 만한 일이지만, 올해 벌어진 기상천외한 사건들은 한국에서 정점을 찍은 듯하다. ‘박근혜 게이트’에 견주면, 브렉시트나 트럼프의 당선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사우스코리아’를 국제 뉴스의 주요 무대로 만든 것은 순전히 박근혜와 최순실의 공이다.

한파가 닥친 지난 26일 서울 광화문 촛불시위 때도 아이를 목말태운 아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자녀의 손을 꼭 붙잡고 행진하는 부모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왜 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섰는가? 박근혜에 대한 분노인가, 농락당한 법치주의·정의를 되살리기 위해서인가? 나는 왜 이 거리에 서 있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촛불을 든 건 ‘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잘 살아야 한다”는 7년 전 봄 돌아가신 어머니가 유언처럼 내게 남긴 말이다. 나는 평생 궁핍했던 어머니가 남긴 그 말의 의미를 잘 안다. 아니, 직감한다. 그건 박정희가 한국 사회에 깊이 심어 놓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와 ‘잘살아야 한다’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은 1988년 8월2일 일기에서 박정희 시대를 이렇게 평했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이후부터, 단 하나의 담론이 모든 것의 우위에 있었다: 우리는 잘살아야 하고, 잘살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가 붙는다. 물질적으로 잘산다는 것을, 그는, 그냥 잘산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조금 부유해졌다고, 과연 잘사는 것일까? 그는 물질을 올리고, 정신·신앙·문화를 낮춘다. 정신적인 가치는 물질적 가치에 종속된다. 언제까지? 다 피폐해져서, 물질적 쾌락만 남을 때까지! 그는 상징적인 히로뽕 판매자였다!”(<행복한 책읽기: 김현 일기 1986~1989>)

박정희는 상징을 팔았다지만 그의 아들은 직접 히로뽕을 맞고 감옥을 들락거렸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대통령이 된 딸은 ‘뽕을 맞은 영혼’의 소유자임이 뒤늦게 발각됐다. 박정희가 키워낸 재벌들은 그의 담론을 가장 충실히 따랐다. 청와대의 ‘강요’에 못 이겨 돈을 냈다고 우기지만, 재벌들이 돈을 뜯겼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은 많지 않다. 그들은 장사꾼이다. 적게 주고 오히려 많이 챙겼을 것이다. 박근혜 게이트는 정치권력과 재벌이 서로 주고받으며 배를 불리는 박정희식 모델의 타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공화국의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재산의 적정한 분배가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뒷받침한다고 봤다. 그래야 서로에게 ‘쫄지’ 않는 자유민이 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1469~1527)는 로마가 점령한 식민지의 부가 로마로 유입되면서 로마인들이 물욕과 탐욕에 물든 것을 공화정 몰락의 원인으로 꼽았다. 박정희가 퍼뜨린 ‘히로뽕’에 중독된 사회, 사회의 부가 소수에 집중된 사회에서 민주공화국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다 피폐해져서, 물질적 쾌락만 남은’ 박정희식 인간의 전형을 최순실한테서 본다. 그건 일그러진 우리 욕망의 자화상일 수 있다. 박근혜를 대통령에서 쫓아내는 것만으로 민주공화국을 바로 세울 수는 없다. 잘 살려면 박정희가 퍼뜨린 ‘히로뽕’을 끊어야 한다.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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