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촛불은 돌아가는 길도 평화롭다. 차량 통제로 널찍하게 열린 대로를 만끽하던 사람들은 금세 차도에서 올라와 인도를 빽빽이 채웠다. 신호 위반조차 없다. 시위는 만원 버스처럼 붐볐을 뿐, 시종 질서있고 평화롭다. 수백만이 도심을 메웠는데도 깨진 유리창 한장 없다. 세계가 놀랐다지만 우리도 놀랐다. 불법과 위반, 무질서와 일탈은 애초 ‘저들’의 일이었기에 ‘촛불’은 질서와 평화를 지켰다. 이번 촛불은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통째로 비선에 넘긴 대통령의 헌법 위반, 국기 문란에 항의하는 것이었다. 대통령과 비선의 뇌물수수, 직권남용 따위 불법과 사적 이익 약탈을 법대로 처벌하라는 주장이었다. 정당한 요구이니 준법과 평화가 가능했다. 대통령 사임과 탄핵을 주장한 것도 그런 방법이 헌법이 허용하는 거의 유일한 절차였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제안한 ‘4월 퇴진 약속’은 설령 ‘2선 후퇴’와 함께라고 해도 아무런 법적 근거와 보장이 없는 비정상적 해법이었다. 정당성이 촛불에 있으니 법과 질서도 촛불 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법원은 경찰의 집회·행진 금지 조처를 잇달아 집행정지시켜 자유로운 집회 길을 텄다. 시위로 체포되거나 기소된 사람도 없다. 집회의 자유가 허가 대상일 수 없다는 헌법 규정에선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일도 얼마 전까지는 통하지 않았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만 해도 기소된 사람이 1258명이었다. 대통령 직접 조사와 뇌물죄 적용도 지금은 불가피한 일이 됐지만, 얼마 전까지도 검찰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대세’가 그렇게 바꾼 것이겠다. 촛불 이전과 이후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 지금이 맞고 그때는 틀리다. 촛불이 비정상을 바로잡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정상은 권력 엘리트 전체의 문제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을 보면, 청와대의 사법권 침해는 일상이었다. 2014년 12월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과 세세한 평의 내용은 선고 며칠 전에 이미 청와대로 유출된 것으로 드러났다. 정권에 유리한 판결을 비판한 판사를 ‘직무배제’해야 한다는 지침을 청와대가 정한 얼마 뒤 대법원에서 그대로 징계가 결정됐다. 하나하나가 헌법이 금지하는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 훼손이다. 청와대가 그렇게 하도록 방치하고 도운 이들도 헌재나 대법원 등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그뿐이겠는가.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에 아무런 제동도 걸지 못한 여당 등도 마찬가지다. 모두 헌정의 제도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데선 공범이다. 촛불은 그런 상황에 분노하면서도 폭발하진 않았다. 법치가 말 그대로 관철되길 요구하되 기존 질서와 제도의 전복 위에 새 질서를 세우는 혁명까진 아직 아닌 듯하다. 다만, 권력 엘리트에 대한 불신과 경고는 분명하다. 여당 등 정치권의 이런저런 정치공학적 시도를 수백만의 촛불로 단숨에 거부한 것이라든지, 야당 지도자들에 대한 촛불 현장의 가차없는 질타가 그런 것이겠다. 그런 점에서 촛불은 임계점을 향해 가는 것일 수 있다.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부결되면 더는 가족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서는 평화는 기대하기 힘들지 모른다. 가결된다고 해도, 그로 인한 공백을 권력 엘리트의 정치공학적 이해다툼으로 채우려다간 더 큰 태풍을 만날 수 있다. 그랬다간 자칫 대의제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 촛불이 요구하는 ‘정상화’는 권력구조 개헌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좀더 광범위하고 본질적인 요구일 수 있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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