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 교수·시민자유대학 이사장 타들어가는 촛불에서 꽃이 피어난다. 제 몸을 태워 살아가는 촛불 꽃은 위험한 만큼 아름답고, 아름다운 만큼 위험하다. 촛불은 켜켜이 쌓여가는 죽음의 서곡을 타고 피어오르는 생명의 꽃이다. 썩어 구린내가 나는 것이라면 제 몸이라도 가차없이 태워버릴 자유의 촛불은 언제든 바리케이드를 넘어설 수 있다. 촛불은 지금 금지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촛불이 자유라면 그 너머는 예속과 굴욕이 지배한다. 한 권력자의 오만과 허영에 기대 제 배를 불려온 자들, 재벌과 친박이 우글대는 곳이다. 저들로부터 예속의 뿌리를 걷어내려면 촛불은 주문과 요구를 넘어 직접 소환과 징벌, 그리고 공정한 권력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신석정이 노래한 해방의 꽃덤불 속에 안기는 그날까지 촛불을 끌 수 없다. 하지만 태워야 할 구태와 불의가 간사하고 사악할수록, 그 무리가 크면 클수록 촛불은 더 독하게 제 몸에 불을 붙여야 한다. 탄핵이든 퇴진이든 이미 얼빠진 대통령이지만 박근혜는 여전히 무서운 괴물의 이마주다. 그는 정신적 판단력만이 아니라 육체적 지각능력도 오래전에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정당한 기준을 가지고 맥락에 맞춰 합리적으로 생각할 능력도 없고,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거나 도움을 호소하는 눈빛에 대답할 능력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지배를 위한 기계, 그것도 매우 뛰어난 계산기임에 틀림없다. 박근혜의 몸과 마음은 오직 하나의 기능, 곧 통치를 위해 특화된 기관이자 기계다. 그의 지금 모습은 아버지 박정희의 가장 사악한 모습을 빼닮은 꼴이다. 왜 통치를 해야 하는지, 어떤 통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식도, 의문도 없이 그저 통치를 위한 기계, 정치 전문 기계로 제작된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생각하거나 느낄 수는 없지만 빼어난 정치적 계산과 술책을 부릴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사라진 뒤에도 괴물의 유전자를 계속 복제해서 유포할 무리들이다. 이들이 변형시킨 유전자를 완전 살처분할 때까지 촛불은 여의도에 주권을 양도해선 안 된다. 박근혜에겐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는 신체가 없다.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신체 없는 기관’으로 주조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특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이자 기관으로서 그의 속살이 우리 자신에게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통치 기계라면 우리 역시 노동 기계, 공부 기계, 생산 기계, 경쟁 기계, 평가 기계, 심지어 소비 기계로 전락하고 있다. 이렇게 어느덧 기계가 된 우리가 또 다른 박근혜를 만들 수 있다. 박근혜는 물러나겠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방인도, 이물질도 아니다. 그는 박정희 신화에 기대어 누군가를 더 많이 누르고, 더 많이 빼앗으려는 우리의 조작된 욕망체계가 만들어낸 돌연변이다. 한마디로 그는 승리와 성공에 대한 집착의 배설물이다. 그러니 촛불이 우리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박근혜를 찾아서 불태우지 않는다면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끝없이 되돌아올 것이다. 오래전 등불로서 기능을 상실했던 촛불이 지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힌 대한민국의 유일한 등불이다. 따라서 지금 정치가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임무는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 의지에 복종하는 것이다. 촛불을 든 시민이 전위라면 정치는 반걸음 뒤에 선 후위가 되어야 한다. 이 순간 촛불보다 앞서 계산하고 촛불 몰래 타협하는 정치는 주권자를 유린하는 범죄다. 혁명의 아침, 정치인과 지식인의 유일한 의무는 시민들의 말을 받아쓰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갯짓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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