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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강신준 칼럼] 문명이냐 야만이냐, 마르크스의 길

등록 2016-12-18 17:37수정 2016-12-18 19:08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우리의 촛불 뒤에 2100시간이 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의 노동시간이 숨겨져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촛불의 시대의식은 마르크스에게서 고전적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적 야만을 문명의 길로 돌리는 첫걸음이 “노동시간의 단축”에 있다고 천명하였던 것이다.

촛불은 이제 탄핵 이후의 국면을 맞고 있다. “반”에서 “합”으로의 변증법적 지양이다. 하지만 지양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혁명이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사례를 우리는 무수히 알고 있다. 가까이는 중동의 민중혁명들이 만들어낸 비극적 난민 사태가 있으며 우리의 경우 1979년 민주화운동이 전두환의 무단통치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그래서 지금의 국면은 촛불 그 자체보다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질적 전환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촛불에 담긴 시대의식을 올바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 시대의식은 무엇인가? 국정농단의 정치적 환멸이 촉매제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순식간에 700만명이 넘는 촛불을 광장으로 불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현장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정치적 상부구조의 토대를 이루는 “헬조선”이라는 경제적 절망이 넓은 공감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촛불의 시대의식은 경제적 절망에 대한 해답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것은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이라는 세계적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우리 시대의 보편성을 뜻하기도 한다.

나는 지난번 글에서 지금 우리가 당면한 것이 문명과 야만의 갈림길이며 그것이 한 세기 전 로자 룩셈부르크가 외쳤던 선택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경제적 절망이 한 세기를 넘어 제자리로 돌아와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인류는 야만을 선택한 결과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었고 그런 다음 두 가지 처방에 의지해 문명의 길을 찾았다. 케인스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적 절망은 이들 두 처방의 유효기간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급속히 세계화하고 있는 기성정치 혐오의 포퓰리즘은 바로 이런 처방 부재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래서 시대의식을 찾는 일은 이들 처방을 거슬러 올라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고전적 기원인 마르크스에게서 다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이들 처방은 마르크스의 본질적 처방을 회피하기 위해 고안된 임시처방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가리킨 문명의 길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사회 변혁의 성서 <자본>에서 문명의 본질을 여가시간에서 찾았고 자본주의적 야만이 이 여가시간을 노동시간으로 바꾼 것(잉여가치)임을 논증하였다. 피로사회, 경제적 절망, 양극화는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노동시간이 길수록 경제적 절망도 깊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연간 노동시간 1790시간과 독일의 1371시간(2015년 기준)은 트럼프를 선택한 미국의 절망이 독일에서 보이지 않는 까닭을 확연히 알려준다. 그래서 우리의 촛불 뒤에 2100시간이 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의 노동시간이 숨겨져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5만7000달러인 데 반해 독일이 고작 4만2000달러(2015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경제적 절망이 결코 성장(국민소득의 증가)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촛불의 시대의식은 마르크스에게서 쉽게 고전적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적 야만을 문명의 길로 돌리는 첫걸음이 “노동시간의 단축”에 있다고 천명하였던 것이다.

탄핵 이후의 국면은 이제 대통령 선거로 이어질 것이다. 촛불이 문명으로 나아갈지 야만으로 뒷걸음질 칠지는 대선후보 가운데 시대의식을 올바로 읽은 후보를 뽑을 수 있을지의 여부로 결정될 것이다. 누가 그런 후보일까?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그 해답도 알려주고 있다. 변화는 하나의 과정이고 씨앗을 뿌리고 키워나가는 선행과정 없이는 결코 열매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오랜 기간이 소요되고 열매는 한 번의 임기로 단번에 얻을 수 없다. 핀란드의 교육개혁이 준비에 20년, 실행에 20년이 걸린 것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노동시간의 단축”을 향해 그 정도의 오랜 기간 스스로 실천해온 후보가 해답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후보가 없다면? 시대의식은 열매를 얻지 못하고 겨우 씨앗을 뿌리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물론 그 씨앗조차도 촛불을 든 대중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시대의식의 실현은 오롯이 대중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이론이 민중에게서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는 오로지 이들 민중이 자신들의 필요를 실현시키는 정도에 달려 있다.”(<헤겔 법철학 비판>) 기로에 선 우리 촛불이 귀담아들어야 할 170년 전 마르크스의 경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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