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저서로 알려진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에서 저자 린 헌트는 ‘정치적 포르노그래피’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국가를 ‘가족’으로, 왕을 ‘아버지’로, 왕비를 ‘어머니’로 간주해온 프랑스인들은 혁명기에 이 통치 가족의 신성성을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당시 각종 팸플릿과 서적, 판화 등은 루이 16세를 발기불능 환자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동성애나 근친성애 등 ‘비정상적’ 섹슈얼리티의 향유자로 묘사했다. 왕가의 성적 사생활을 음란하고 색정적으로 그리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통치 자격 박탈을 정당화하는 가장 유력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가 암시하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던 통치자의 성과 사생활에 대한 민중의 무람없는 관심이 낡은 레짐을 무너뜨리는 ‘혁명적 전복성’을 띨 수도 있다는 점이다. 코믹물에서 에로물, 이제는 오컬트물로 변해간다는 박근혜 게이트의 전개는 자연스럽게 린 헌트의 이 분석을 떠올리게 한다. 청와대가 구입했다는 의심스런 약품들, 전 국민 앞에 전시되는 대통령 얼굴의 주사 자국, 그리고 그게 인화성 강한 질료가 되어 수백만의 시민을 광장에 모이게 하는 것을 볼 때 정치적 포르노그래피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통치자의 정치적 부패뿐 아니라, 가족사와 섹슈얼리티, 드라마 취향마저 ‘정치적인 것’으로 이야기되는 장면이야말로 진정 혁명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좀더 음미돼야 할 것은, 린 헌트가 정치적 포르노그래피와 관련해 신중하게 적어둔 민중의 ‘활기’와 ‘불안’, 그 양가성이다. 그는 정치적 포르노그래피들이 일종의 ‘도약’을 가능케 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가부장을 죽인 후 어머니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형제들’의 불안을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가부장의 권위가 정당하지 않은 것이었음이 드러났을 때, 그 부당한 권위에 근거해 배치돼온 여성들의 불평등한 위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은 것이다. 결국 프랑스 민중은 마리 앙투아네트 및 공적으로 활발한 여성들을 공격함으로써 남성들의 유대감을 바탕으로 공화국의 질서를 강화했다. 린 헌트가 프랑스 혁명을 ‘가족’이라는 전(前) 정치적 범주에 갇힌 ‘형제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말한 이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때 프랑스에서 ‘여성의 시민적 지위의 모순’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1년에 발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 점을 기억한다면, 현재 광장에서 “혐오와 민주주의는 함께 갈 수 없다”고 외치는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단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규율의 언어로 치부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일부의 의심과 달리,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별의 사례를 적발하는 데 그치거나, 무조건적인 “평화”와 “비폭력”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이 요구하는 것은 지배권력이 규정해온 ‘평화’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 항쟁이 ‘형제들의 배타적인 가족계획으로 수렴되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를 상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가’야말로 페미니스트들의 질문이다. 진정한 혁명은 왕의 목을 친 때가 아니라, 구체제에서 배제돼온 존재들이 새로운 시민적 질서를 상상한 바로 그때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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