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2차대전 이후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 구도를 규정한 미-중-러 세 나라의 관계는 항미 중-소 블록, 반소 미-중 연대, 비미 중-러 화해로 변해왔다. 친러반중을 표방하는 트럼프의 등장은 반중 미-러 협력의 시대를 열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등장으로 미국-중국-러시아의 관계가 요동친다. 트럼프의 친러반중 입장이 중국을 고립시키는 유례없는 반중 미-러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2차대전 이후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 구도를 규정한 세 나라의 관계는 지금까지 몇 단계를 거쳐왔다. 1단계가 항미 소-중 블록이었다. 2차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으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진영의 냉전으로 본격화됐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소련과 중국이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둔 소-중 블록을 형성했다. 미국은 사회주의권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로 맞섰다. 하지만 중-소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 본질은 유라시아 대륙세력 패권을 둔 경쟁이었다. 1960년대 국경분쟁으로 표면화된 중-소 분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적대 관계로 바뀌었다. 미국은 주적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화해로 내달았다. 2단계가 반소 미-중 연대이다. 미국과 중국은 1972년 상하이 공동성명을 통해 반소 연대 전선을 구축했다. 이미 미국은 닉슨 독트린을 통해서 아시아에서 미 군사력의 개입 축소와 대중 봉쇄선 완화를 천명했다. 베트남전 종전을 추진하는 한편 주한미군 감축과 아시아 방위선 후퇴를 단행했다. 중-미 연대에 맞선 소련은 베트남의 깜라인만을 조차하며, 중국을 더욱 옥죄려 했다. 1979년 미-중 수교 때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이 베트남 응징을 시사하자,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의 위성정보 지원 등을 약속했다. 그해 2월 벌어진 중-월 전쟁에 대해 화궈펑 중국 주석은 “우리는 달리는 호랑이의 엉덩이를 만졌다”고 말했다. 사실상 소련을 겨냥한 전쟁이란 뜻이다. 1980년대 후반 미국이 아시아 최대인 필리핀의 수비크 해군 및 클라크 공군 기지 철수로 방위선을 대폭 후퇴시키며 미국의 대중 배려는 절정에 달했다. 곧 1991년 소련이 붕괴했다. 3단계가 비(批)미 중-러 화해이다. 소련 붕괴 뒤 미국은 보리스 옐친의 러시아를 친미 종속 정권으로 만드는 한편 중국과의 협력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옐친 정권이 붕괴하고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들어서면서 미국과 대립으로 이어졌다. 국력이 성장하는 중국 역시 미국과 경쟁 관계로 들어섰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을 비판하는 화해협력 관계로 돌아섰다. 나토의 동진에 맞서던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를 합병해, 냉전 종식의 상징인 러시아의 새로운 국경선을 변경시켰다. 중국은 미국에 대해 국제질서에서 동등한 몫을 주장하는 ‘신형 대국관계’를 제시하며, 미-중(G2) 시대를 알렸다. 미국은 아시아 귀환 정책을 선언했다.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개입했다. 닉슨 독트린으로 후퇴했던 아시아 방위선을 다시 중국 쪽으로 전진시켰다. 한국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배치, 필리핀 군사기지 재확보, 오스트레일리아 미군 주둔, 미얀마와의 수교 및 몽골과의 우호협력 등으로 중국을 다시 포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트럼프의 친러반중 입장이 1970년대 닉슨의 중국 연대 정책만큼이나 미국 기존 외교전략의 일대 전환이 될 수 있을까? 닉슨 때 미국은 소련과 데탕트 정책으로 화해 중이었고, 강경한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고수하는 중국과는 대립 중이었다. 하지만 닉슨은 미국의 주적이 소련이고 중국과는 협력할 수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지정학적 탁견을 구현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중-소 분쟁이었다. 하지만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화해협력 관계이다. 또 트럼프가 주장하는 러시아와의 협력은 미국 헤게모니의 주축인 대서양 양안 동맹의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러시아 위협을 전제로 한 나토 등 유럽 쪽 동맹 체제의 균열을 의미한다.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경쟁은 불가피하나, 지정학적인 적대관계로의 악화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 주류의 기존 외교전략이다. 미국의 주적이 이제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임은 분명하다. 트럼프가 반중 미-러 협력의 새로운 전략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할까. 그는 닉슨처럼 거대한 체스판에서 신의 한 수를 둘 수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러시아 사업 이권에 추동된 전략적 자충수에 불과할까. 트럼프가 몰고 온 러시아의 미국 선거 개입, ‘하나의 중국’ 정책 부정 등은 격변하는 미-중-러 관계의 반영이다.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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