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100만 인파가 메운 광장. 연단에 오른 여성 연사가 여성 대통령을 매섭게 질타한다. 엄청난 호응이 광장을 삼킨다. 앞에 서 있던 남성이 신이 나서 맞장구를 친다.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야!” 이런 발언에 뒤따르기 마련인 격렬한 논쟁에 나는 어떤 경우에도 발 들이지 않았다. 논점 자체가 함정이다. 사실이기 때문에. 권한행사가 중지된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 다른 맥락이므로 멀리 치워둔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맞다. 그리고 남자의 적은 남자다. 높은 확률로 한 성별의 적은 동성이 된다. 범주 중첩이 큰 개체들이 적대적 관계를 쉽게 형성한다는 사실은 사회학보다 근본적인 동물학적인 진리라 새로울 게 없다. 정교하게 부연하자면 남자의 적이 남자가 될 소지가 훨씬 크다. 패권 집단은 기득권 쟁취를 위해 더욱 치열하게 다툰다. 남자는 평생 동안 서로를 적대하는 경쟁 환경에 놓인다. 주류 스포츠는 대개 외나무다리 앞에 선 남자 대 남자의 사투다. 이 승자독식의 전쟁에서 우리는 승자의 영광만큼이나 고통을 인내하려 애쓰는 패자의 절망에 열광한다. 스포츠맨십은 기만이다. 상대를 제거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게임에서 낭만은 관객만의 몫이다. 맥주를 곁들여 경기를 관람하며 동지애를 다진 직장 남성들은 곧 같은 처지로 내몰릴 운명이다. 동지애는 승진의 길목에서 갈라선다. 한쪽이 패배한 밤에는 남성 연대도 침묵한다. 혼자 만취한 채로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는다면 상대는 십중팔구 같은 만큼 취한 남성일 것이다. 그런 날이면 평소 마음이 끌리던 여성의 얼굴이 떠오를까? 그렇다면 먼저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다. 더 뛰어나고 더 매력적인 남성. 삼각관계는 일반적인 상황이라 모든 멜로의 단골소재가 된다. 남자 주인공의 적대 세력이 여자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정 자체로 반전이다. 남성을 위협하는 적은 언제나 남성이다. 한 남성이 많은 것을 쟁취했다면 나머지 남성들은 그만큼을 빼앗겼다는 뜻이다. 자원은 유한하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도드라지는 이유는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동지적 연대체를 유지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여성의 정서적 유대에 끼어들 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남성들은 학창 시절부터 관찰하고 경험한다. 그래서 여성 사이에서 발생한 충돌을 관찰하는 것은 특별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흥미진진한 느낌 아래 도사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절박한 생존연대의 붕괴를 부추기며 가학적으로 즐거워하는 인간 영혼의 어둡고 사악한 면이다. 트럼프가 당선된 뒤 한국, 중국, 일본은 대미 외교 강화를 위해 경쟁적으로 역량을 동원하고 있다. 반면 한·일은 과거사와 독도 문제로, 한·중은 사드 문제로, 중·일은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로 인한 갈등을 아직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심야의 서울역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택시기사들 사이에 벌어진 멱살다툼 같은 풍경이다. 승객일 때 우리는 굳이 “택시의 적은 택시”라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백악관에 들어가 트럼프를 독대한다면 이렇게 조롱당하는 상황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헤이, 버디! 황인종은 열등해서 마치 거울 보는 기분으로 서로를 싫어한다는 말이 정말인가 보군, 껄껄.” 동아시아 전쟁사를 통틀어 사망자를 집계한다 해도 2차대전 중 서로 죽인 백인의 수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모욕감은 권력 격차가 확인될 때만 발생하는 감정이니까. 트럼프는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래서, 자네는 중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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