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최순실 게이트’를 보도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유명한 50대의 여성 소설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또래 작가 몇 명이서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정유라는 분명히 박근혜 딸이야. 유럽의 소설을 보면 공주가 몰래 낳은 아이를 하녀가 자기 자식인 척 기르는 이야기가 많아. 정유라가 딱 그 경우야.” 나도 곧 ‘소설 같은 설정’에 빨려들었다. 40년 넘게 남들 눈을 피해온 최순실이 유독 정유라와 관련된 승마와 대학 문제만은 직접 나서는 걸 보고 “주군의 딸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구나”라고 짐작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승마 쪽 관련자들은 “유라가 엄마한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더군요. 그걸 듣고는 ‘아! 친딸이 아닌가 보구나’라고 생각했어요”라고 증언했다. 삼성이 정유라의 독일 승마훈련에 몇백억원을 지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의심은 짙어졌다. “최순실한테 현찰로 슬쩍 찔러주면 간단하고 깔끔할 텐데, 저토록 복잡하게 일을 처리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삼성이니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거지.” 결정적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다. 대통령은 2013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의 노태강 국장과 진재수 과장을 ‘나쁜 사람’이라고 지목할 때는 수첩을 꺼내들고 이름을 말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올해 초 보고서를 읽다가 ‘노태강’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외쳤다. “이 사람이 아직도 있어요?” 대통령의 지적 수준은 이제 온 국민이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런 사람이 몇 년 전 한번 들었던 이름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건 뭔가 ‘사무치는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모성애’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정유라의 중·고등학교 시절 사진은 최순실을 너무도 빼닮아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1996년 최순실이 유치원 원장을 할 무렵 배부른 모습을 봤다는 목격자의 말을 듣고는 조용히 가설을 폐기했다. 그렇다고 의문이 풀린 건 아니다. ‘최순실은 왜? 정유라는 왜? 삼성은 왜?’라는 궁금증은 여전하다. 특히 ‘대통령은 왜?’가 잘 안 풀린다. 세월호 7시간을 통해 대통령의 공감 능력은 이제 온 국민이 다 아는 상식이 됐다. 아이들이 떼로 가라앉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올림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느라 75분을 알뜰하게 사용한 사람이다. 그토록 차분하고 침착한 대통령이 “세월호 난 그다음날, 체육개혁 확실히 하라고 오더 내려왔다”는 게 녹취록에 담겨 있는 김종 전 차관의 육성이다. 여기서 체육개혁은 물론 정유라가 하는 승마 문제다. 김종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은 4월17일 팽목항의 시린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정유라를 생각했다는 얘기가 된다. 정유라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토록 애틋한 존재일까. 300명 가까운 1997년생 세월호 아이들로는 미동도 않는 대통령이 어떻게 1996년생인 정유라 하나에는 그토록 흔들리는 것일까. 분명코 심장은 하나일 터인데, 한쪽은 얼음처럼 차갑고 다른 쪽은 숯불처럼 뜨겁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다. 박영수 특검이 21일 현판식을 열고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정유라를 체포하기 위해 독일에 사법공조도 요청했다고 한다. 이제 갓 스무살인 정유라 하나 때문에 왜 온 나라가 미쳐돌아갔는지, 대통령의 애정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는지 밝혀줬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도대체 대통령의 심리 상태를 알아야 국민으로서, 유권자로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 아닌가.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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