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형설지공(螢雪之功). ‘반딧불과 눈빛에 의지해 글을 읽어 이룬 공’이라는 뜻이다. 옛사람들에게 가난이란 ‘인공조명 없는 캄캄한 밤’과 대략 같은 뜻이었다. 전래설화에는 밤에 산길을 헤매던 과객이 은은히 비치는 불빛을 따라가서 외딴집을 발견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다 알다시피 그런 집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첩첩산중 외딴집에서 밤에 불을 밝히는 건 상례에서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옛날에는 조명 비용도 녹록지 않았다. 실내 조명기구로는 작은 그릇에 액체 기름을 담고 심지를 띄운 등잔과 고형 기름에 심지를 박은 초(燭)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품이 많이 들어가는 촛값이 훨씬 비쌌다. 그래서 초는 궁중 조명용이나 제례용으로만 사용되었으니, 어지간한 양반들 사이에서도 귀한 선물용품으로 대접받았다. 초의 기원은 기원전 3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850년 원유에서 파라핀 왁스를 추출하는 기술이 개발됨에 따라 성능은 향상되고 가격은 떨어지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파라핀 왁스와 개량된 심지를 사용한 초가 ‘양초’(洋燭)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본격 수입된 것은 1900년께로 추정된다. 1906년에는 이광수라는 사람이 일본에서 양초 제조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 초동에 납촉일광회사(臘燭一光會社)를 설립하고 생산, 판매를 개시했다. 이후 양초는 주로 제례용품으로 특화했다. 조선 후기에도 제사에 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책잡힐 일이었는데, 이는 아마도 하늘로 향하는 불과 녹아내리는 몸통이 정성을 드리는 자의 심신 상태와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터이다. 다만 가정용 조명기구의 주력이 석유램프에서 전등으로 바뀌던 무렵에는 전력 공급이 불안정하고 전등도 부실해서, 양초가 비상용 조명기구 구실을 했다. 2002년 12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불붙인 양초를 들었다. 그날 이후 양초는, 평화와 정의를 향한 한국인의 염원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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