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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화해의 힘인가 전쟁의 힘인가 / 서재정

등록 2016-12-28 18:33수정 2016-12-28 20:53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입을 모아 “화해의 힘”을 강조했다. 그러나 진정한 ‘화해’는 없었다. ‘힘’을 내세우는 미-일 동맹만 요란했다.

75년 전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했다.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한 전투기와 폭격기 등이 퍼부은 공격으로 미 군함 8척이 모두 손상되거나 침몰됐다. 미군 2천여명이 사망하고 천여명이 부상당했다. 이때 전함 애리조나호가 침몰했고, 병사 1177명이 사망했다. 최악의 피해였다. 다음날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4년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적대국이 전쟁이 끝난 후에는 최강의 동맹국이 되었다. 애리조나호를 인양해 설립한 기념관에서 아베 총리는 헌화하고 묵념했다. “우리를 연결한 것은 관용의 마음이 빚어낸 화해의 힘”이라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화답했다.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을 “화해의 힘을 보여준 역사적 제스처”라고 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사과하지 않았다.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하기는 했지만, 미국 침공에 대한 사죄는 없었다. 진주만과 거의 동시에 일본이 공격했던 필리핀과 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었다.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출발점이었던 조선반도와 타이완(대만)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언급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해는 없었다. 역사에 대한 거친 공격이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아베 총리와 오바마 대통령은 쌍둥이다. 지난 5월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일본인이 겪었던 고통에 애도를 표했다. ‘핵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미래의 평화를 호소했다. 하지만 그는 사과하지 않았다. 반인도적 살상무기로 민간인을 대량 살상한 미국의 과거는 그렇게 넘어갔다.

이들은 서로의 아픈 과거를 묻고 희망찬 평화의 미래를 얘기하기에 바쁘다. 아베 총리는 “전쟁의 공포를 결코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 다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양국 동맹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있어 평화와 예의(civility)의 주춧돌”이라고.

과거를 묻지 않고, 사과를 하지 않는 이유다. 미-일 동맹은 ‘상호방위’ 동맹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일 동맹이 미국이나 일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을 그 활동범위로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에 작동되는 ‘전수방어’ 동맹이 아니라 ‘평화와 예의’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서태평양에서 벌어진 상황이 그 전조가 아닐까. 크리스마스인 25일 서태평양으로 진출한 중국의 랴오닝호 항모전단을 일본 잠수함이 추격하는 일이 있었다. 중국군은 대잠 헬기를 출동시켜 잠수함을 추격했다. 일본은 항공자위대 F-15J 전투기를 출동시켰다. 미군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 각료회의는 22일 안보 관련법 세부 운영지침을 확정했다. 새 지침에 따라 센카쿠(댜오위다오)에서 중국을 감시하는 미군 함선 보호 명분으로 자위대의 무기 사용이 가능하다. 북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했을 때도 이 지침이 적용된다.

아베 내각은 이제 헌법 개정으로 자위대를 국군으로 만들려고 한다. 적어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한 1949년부터 미국이 지원해온 ‘화해’의 역사다. 내년 초 취임하는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 ‘화해의 힘’을 강화시키지 않을까. 한반도 주변은 출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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