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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과학계 블랙리스트 / 김우재

등록 2017-01-02 18:18수정 2017-01-02 19:22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5년 전 일이다. 한국과학창의재단에 ‘과학지식인 열전’을 연재하고 있었다. 과학자는 상아탑에 갇힌 지식인이 아니고, 사회와 끝없이 소통해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국 사회에도 과학의 사회적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영국 과학자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송고한 글이 실리지 않았다. 이메일에 답이 없었다. 어렵게 연결된 담당 기자는 글이 중복되었다는 황당한 변명을 했다. 계속 따져 물었다. 부장 직함을 단 인물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 충격으로 당시 활발하게 쓰던 개인 블로그를 몇 년 쉬었다. 글 쓰는 일에 회의를 느꼈고, 거기서 벗어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근 번역된 책 <과학과 사회주의>는 20세기 초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과학자 5명의 집단전기다. 이 책은 버널, 홀데인, 호그벤, 레비, 니덤을 중심으로 당시 격변하던 세계와 이에 대응해 사회와 조우하려던 과학자들의 투쟁을 담아낸다. 사회주의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새로운 세계관이었고, 과학자들도 그 새로운 이념을 과학자의 정체성 속으로 흡수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역사의 전환점에 과학자들이 있었다. 과학은 그런 것이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연재가 중단되어야만 했다. 도대체 왜 과학자의 글에 사회주의가 나오느냐는 것이다. 화가 났지만 한국 사회가 과학자라는 계층을 바라보는 수준과 기대치를 철저하게 직시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과학자가 순종적인 노예이길 바란다. 정치적이어선 안 되고, 국가가 던져주는 잿밥에 만족하고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중인계층이길 바란다. 과학자는 반정부적인 지식인들을 닮으려 해서는 안 된다. 가장 윗선에 있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었고, 연재 중단 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단했다. 혐오가 밀려왔고, 스스로 펜을 접었다.

재미있는 일이다. 당시 창의재단 신임 이사장 강혜련은 조직인사관리를 전공한 경영학 교수였고, 3월부터 이사장에 선임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는 과학계 인사 3명을 제치고 선임되었고, 직후 내 연재가 중단되었다. 우연일 것이다. 낙하산 인사라는 의혹이 있고, 과학과 관련한 어떤 연구도 수행한 적이 없는 인물이 이사장이 된 후, 과학자의 사회참여를 독려하던 연재가 중단된 것은 철저히 우연일 것이다. 우병우 장모가 우연히 최순실과 골프를 쳤고, 최순실의 성형외과 주치의가 우연히 대통령을 만난 것처럼,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지낸 이사장이 선임된 직후 내 글이 퇴출된 것은 우연일 것이다. 우연은 계속된다. 최근 모두가 존경하던 김승환 창의재단 이사장이 이유 없이 사퇴하고, 그 자리에 ‘말(馬) 전문가’가 지원한 것도, 게다가 그가 정유라 특혜의 주역인 교수 남편이라는 것도 모두 우연일 것이다.

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부럽다.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문화계가 지닌 위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록 정부의 반대편에 서 있지만, 문화계는 한국 사회를 이끌어왔고 이끌어가는 권력인 것이다. 김기춘은 그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문화계를 지목하고 길들이려 한 것이다. 과학계엔 블랙리스트가 없다. 기뻐할 일이 아니다. 과학계는 위협적이지 않다는 뜻이니까. 얼마 전 헝가리 정부가 최대 일간지인 <넵서버차그>를 폐간하자, 헝가리 출신 노벨생리학상 수상자인 토르스텐 비셀은 기자회견과 함께 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외부위원직에서 사퇴했다. 박근혜 탄핵에 대해 한국과총과 한림원이 어떤 의견을 표명했는지 한번 검색해보라. 처참하다. 과학계 내부의 탄핵이 시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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